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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영 Oct 28. 2019

안나푸르나 쏘롱라패스를 넘다.

사표를 던지고 히말라야로..

사표를 던지고 히말라야로




생애 첫 히말라야 트레킹으로 한 달 일정을 계획했고, 안나푸르나 라운드와 안나푸르나 생츄어리, 마르디 히말 등 총 세 개 코스를 선택했다. 안나푸르나 지역은 네팔의 중앙에 위치하였으며 세계에서 10번째로 높은 곳으로 네팔 트레킹 루트 중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이다.


네팔에서의 첫날...
점심 무렵 네팔의 번화가 타멜(Thamel)에서 미리 연락해두었던 가이드와 포터를 만났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우리 셋은 한 달간 지속될 나의 첫 히말라야 트레킹의 동행자가 되어 번잡한 타멜 시내를 떠나 택시와 로컬버스를 갈아타며 장장 7시간을 달렸다. 비포장도로와 아찔한 고갯길을 넘어 달리고 달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의 시작지점 베시사하르(Besishahar)에 도착한 때는 이미 늦은 밤. 하지만 힘들게 찾아온 이방인에게 이 늦은 밤 묵을 방이 없다고 한다. 가이드의 빠른 대처로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숙소를 운 좋게도 얻을 수 있었다.
센스 있는 가이드가 화장실 딸린 괜찮은 방이라며 나름 신경써주어 얻어주었지만 낡은 나무 침대와 변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퀴퀴한 하수구 냄새에다 다음날 시작될 트레킹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여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시 졸았나 싶은 새벽. 코끝으로 느껴지는 싸늘한 아침 공기에 눈이 떠졌다. 숙소에서 짐을 챙겨 자갓(Jagat)까지 가는 지프를 타기위해 마을 입구까지 걸어 나와 롯지 식당 한편에 자리를 잡고 차 한 잔과 토스트 한 쪽을 주문해 먹으며 지프를 기다렸다.




마침 베시사하르는 네팔 대통령 선거로 인해 대부분의 지프가 선거 투표장을 오가는 곳으로 동원되어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그나마 몇 대 있는 지프는 너무 비싼 가격을 제시하였다. 할 수 없이 가이드와 상의하여 결국에는 지프대신 걸어서 트레킹을 시작하기로 하고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베시사하르를 출발 첫날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날은 베시사하르에서 나디(Ngadi)까지  걷기로 하였다 . 트레킹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 군인들 무리가 보인다. 트레커 통행을 확인하는 일종의 체크 포인트인 듯싶다. 퍼밋(허가서)을 확인 하는 군인들에게 가이드는 능숙하게 허가서를 보여주고 무사히 통과. 오늘 아침 지프를 못 구해 한바탕 소동이 있었는데다 밤새 잠을 설쳤던 탓인지 머리가 멍했는데, 체크포인트에 서 있는 한 무리의 군인들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다.
걷다 보니 문득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는 가이드와 포터가 눈에 들어온다. 어제 타멜에서 처음 만난 터라 난 가이드와 포터와 친해질 기회가 없는데 그들은 가는 내내 내가 못 알아듣는 자신들의 모국어로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내심 그들이 좀 부러웠다.



텅 빈 롯지에서 융숭한 대접받으며 산행


트레킹 첫날에 낯선 땅에서 혼자라는 외로움과 그들과 나는 다르다는 괴리감에 위축되는 느낌이었지만 트레킹 도중에서 만난 네팔 꼬마들의 가벼운 장난에 외로움을 다소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걷던 중 어여쁜 꽃들이 만발한 롯지를 발견했다. 롯지를 둘러보며 걷던 중 낯익은 모습을 한 한국인 부부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아직 지치지 않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있는 롯지에서 하루 쉬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타지에서 만난 동포를 만나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 있을까?

하루 종일 말없이 걷던 나는 처음만난 분들인데도 평소의 낯가림을 버리고 시시콜콜 지나온 이야기들을 나누며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을 지독히 짠 모모와 미지근한 맥주로 달랠 수 있었다. 11월이라 한산한 롯지를 한국인 3명이 독차지한 셈이다. 다음날, 여행 초반이라 바리바리 싸온 나의 간식과 포카리스웨트 분말 등을 그들에게 주고 아쉬워하며 헤어졌다.(나중에 그분들은 쏘롱 라 패스 고산을 내가 준 포카리스웨트로 잘 넘겼다고 전해왔다) 아침 일찍 부부를 뒤로하고 다음일정 자곳(Jharkot)까지 걷기로 하였다.

참제(Chamje)도 성수기가 지나 손님 없이 텅 빈 롯지가 대부분이라 덕분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메뉴에 치킨을 추가해 시킨 프라이드 라이스는 씹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 먹지 못하고 버려야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고산에서는 동절기까지 필요한 식재료를 말려두었다가 요리 하곤 하므로 말린 닭고기를 튀겨서 요리해서 그렇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아침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 세면대와 씨름하였다. 일교차가 심한 네팔은 밤사이 수도가 얼고 다음날 아침 해가 쨍쨍 나야 수도가 녹아 씻을 수 있다. 전날 미리 주문해 놓은 스크램블에그와 밀크티를 마셨다. 어제의 식사로 다소 걱정을 했지만 라운딩 내내 먹은 음식중 손에 꼽을 정도의 부드럽고 촉촉한 달걀요리였다.





  넷째 날의 시작. 겨울이지만 한낮의 햇볕은 한여름을 방불케 할 만  큼 뜨거웠다. 하지만 트레킹 도중 물을 사려고 들른 가게 그 어느 곳에도 냉장고는 없었다. 처음에는 미지근한 물만 마시다 보니 갈증해소가 안 되는 것 같았지만 트레킹을 거듭하다보니 차츰 익숙해진다. 차메(Chame)에서 피자를 주문했는데 1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가이드에게 물으니 원래 이렇다 한다. 주문받자마자 야채를 뜯고 반죽을 시작하여 나오니 늦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다시 걷기 시작하여 3시경에 브라탕(Bhratang)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인해 이미 만원이다. 고급스런 호텔조차 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듀크로포카리(Dhukurpokhary)까지 이동했더니 이미 4시 30분이다.

늦은 도착으로 평소보다 늦게 잠이 들었지만 마찬가지로 새벽에 일어나 짜파티(네팔식 빵)와 네팔의 신선한 꿀, 그리고 고산버섯으로 만든 수프를 먹고 피상(Pisang)으로 출발한다. 3,000m 대에 들어오자 숨이 가빠지고 소화가 안되는 느낌이 계속 느껴져 조금씩 쉬어가며 걸음을 옮겨야 했다.


간간히 느끼는 고소증세에도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마낭((Manang, 3,600m)....이제는 두통에 얼굴쪽으로 열까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숙소를 잡자마자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어 침대에 펴고 비아그라 반 알을 삼키고 누웠다. 30분쯤 누워있으니 가이드 마힌드라가 평소와 달리 꼼짝도 않는 나의 방문을 노크한다. 문을 열고 벌게진 나의 안색을 보더니 ‘누워만 있으면 안된다’며  흐느적거리는 나를

다이닝룸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는 고산병은 잘 먹어야한다며 마늘수프와 차를 먹도록 하였다. 마낭은 유럽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서인지 그럴듯한 베이커리도 있어 다행이다. 가이드 마힌드라와 포터 키산드라와 함께 차를 마시니 조금 나아지는 듯하다. 고소적응을 위해 다음 날까지 마낭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동하기로 한 후 고산병이 오면 어쩌나 조바심을 하며 잠이 들었다.



    어느덧 여덟째 날. 걱정과 달리 아침이 되자 두통도 말끔히 사라지고 컨디션도 좋아져 인근을 올라갔다 내려오며 고소 적응으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야카르카(Yak Kharka)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가는 길가에 보이는 봉우리들을 사진 속에 담는 나를 보고가이드 마힌드라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설산들 대부분이 7,900m대라고 한다. 트레킹 내내 서양인들 틈바구니에서 나홀로 동양인에다 외국어도 잘못하고 낯가림까지 하는 나는 늘 혼자인 느낌이 들어 외롭다. 하지만 트레킹 중 만나는 웅장한 설산과 아름다운 풍경은 나를 위로해주어 다행이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하이캠프까지 한 번에 올라가지만 약간의 두통을 느낀 난 쏘롱 라 패디(Thorung La Phedi)에서 휴식한 후 다음날 출발하기로 하였다.   
  새벽에 어지러움과 구토증으로 잠을 깬 나는 아침으로 주문한 네팔 라면 면발을 삼키기 힘들었다. 모래알이 이런 맛일까? 국물만을 겨우 먹고 일어나 느릿느릿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였다. 평소 한국에 있을 때도 자주 체하던 나는 이 날도 고산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구토와 두통을 참으며 한 걸음씩 발을 떼었다. 그 모습을 본 가이드 마힌드라는 가방을 달라고 하였지만 “괜찮아 나 체한거야 조금 있음 나아질거야” 하고 반복해 말하며 어느덧 쏘롱 라 패스(5,416m)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산증이 얼마나 위험한지 정확히 몰라서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쏘롱 라 패스에서 나는 고산증으로 부어오른 얼굴에 바라클라바와 모자를 눌러 쓰고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있어 굴리면 굴러갈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을 넘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던 나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묵티나트(Muktinath)까지 가는 길은 인가하나 없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고 가는 내내 흘러내려 미끄러운 흙길을 오르내림을 반복해야 했다. 그동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고산병으로 늘어지는 발을 질질 끌며 모래사막 같은 길을 걷던 나는 음식을 입에 넣는 것마저 큰 고역이 되었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나는 남편이 준비해준 에너지젤과 포카리스웨트 분말을 물에 타서 마시며 묵티나트까지 긴 길을 걸어와야만 했다.

  서울에서 떠나기 전 빠진 왼쪽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 부어올라 가는 중간 중간 붕대로 다시 동여매며 이를 악물고 버텨가길 9시간... 드디어 저 멀리 불교사원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고집으로 한 시간 전 작은 마을 무스탕에서 자지 않고 묵티나트까지 왔는데 내 판단이 옳았다. 묵티나트에서 트레킹 동안 만났던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큰 고비를 넘겼다며 서로 축하를 나눌 수 있었다.  내 지친 발과 몸 상태로 인해 본래 걸어서 이어가기로 했던 앞으로의 길 일부를 차량을 이용해 이동하기로 하고 다음 일정인 ABC를 대비하기로 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샤워를 하고 다리를 쭉 펴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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