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ddest thing 1

by 이룸

그녀가 사라진 후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소송』에서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된 요제프 K처럼, 『변신』에서 어느 날 갑자기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카프카적 상황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한 번 빠져든 이상, 어떻게도 헤어날 도리가 없었다.

*

난독증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나에게 증상으로써 나타날 줄이야!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줄곧 해오던 일이었건만, 글자들이 겹쳐 보이는가 하면, 춤을 추듯 흔들거리기도 하고, 갑자기 공중에 붕 떠올랐다가 흩어져 버리기도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어디에 안착하지를 못했다. 글쓰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 마음도 증발해 버렸다. 그리하여 거실을 왔다 갔다 거닐었다. 베란다 쪽으로 갔다가 부엌 쪽으로 갔다가, 다시 부엌에서 베란다로……. 유리가 다시 돌아오는 상상을 연거푸 해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싶은 염려가 스며들 지경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상황에서의 발가벗은 내 모습은 생기를 잃었다. 흥분은커녕 그 어떤 의욕도 일렁이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뭐 괜찮아지겠지 싶었지만, 아니었다. 사흘, 나흘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전에도 편집 일을 하면서 다양한 증상이 있어 왔다. 때론 눈알이 빠져나갈 것 같은 상태가 되기도 했고, 어깨에 마비 증상이 나타나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가 하면, 눈으로는 글자를 읽어가면서 정신은 멍한 상태가 되어 한두 시간을 허비한다든가……. 그러나 그런 증상들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을 하면 사라지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었다.

결국 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일을 그만두어야겠습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장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글씨가 깨져 보이고, 겹쳐 보이고, 날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사장이 히득히득 웃어 보였다.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어. 사우나라도 갔다 와.”

“일시적이 아닙니다. 월요일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럽니다.”

“눈 나빠진 것 아냐? 안과에는 가봤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님 얼굴은 또렷이 잘 보입니다.”

사장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몇 개야?”

“두 개입니다.”

사장이 다시 네 개를 펼쳐보였다.

“이번엔?”

“네 개입니다.”

“허, 이거야 원…… 별일이 다 있네. 손가락은 잘 움직여지나?”

“네.”

나는 양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다른 데는 아무 이상 없단 말이지?”

“네.”

사장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만에 입을 떼었다.

“그럼 말이야, 당분간 물류창고에서 일해 보는 게 어때? 그동안 너무 머리만 쓰고 살아서 그럴지도 몰라. 몸 쓰는 일을 하면 조만간 좋아질 거야. 그동안 자네 맡은 일은 내가 하고 있을 테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 참 명쾌한 해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월급이 줄어드는 건 각오해야 해. 그러니까 다시 원래 받던 돈을 받고 싶으면 노력해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사장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하여 물류창고에서 일하게 되었다.

물류운송차가 운반해 온 책을 창고에 정리하고, 주문받은 책을 포장하고, 재고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특별한 숙련 기간이 필요 없는 단순 업무였다.

한바탕 정리 작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함께 일하던 왜소한 몸집의 남자와 나는 창고 밖으로 나와 화단가에 앉아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함께 일한다기보다는, 나는 그 남자가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에 불과했다.

“무슨 일 하다가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자가 물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에 조심스런 말투였다. 돋보기안경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있다고요? 그럼, 투잡인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잠시…… 글자가 안 보여서요. 글자가 다시 보이게 될 때까지만…….”

아,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그런 적이 있었소.”

아니, 이 남자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나는 새삼스레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고3때였소. 어느 날부턴가 책을 펴고 보면 글자가 깨져 보이고 부옇게 보이는 거였소. 칠판의 글씨는 잘 보이는데 말이오. 그래서 난 한동안 공부를 할 수 없었지요. 그렇잖아도 공부하기 싫었는데 잘됐다 싶었소. 그래서 공부는 안 하고 공책에 낙서를 하곤 했지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무언가 생각나는 대로 끼적거리기도 하고 말이오. 깨져 보이고 부옇게 보이니 그게 묘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였소. 난생 처음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기분이 들었지 뭐요. 남이 만든 것만 지겹도록 주워 담다가 내 안에 있는 걸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다 그리거나 쓰고 나면 공책을 세워두고서 뒷걸음치면서 바라보았다오. 그러면 깨지고 부옇던 것이 점점 또렷해지고 선명해지는 거였소. 거의 마술과 같았다오. 정말 황홀했소. 에로틱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디다. 그때 작심을 했소. 화가나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말이오. 하지만 그림은 도구가 여러 가지 필요해서 번잡스럽고 돈도 꽤 들어갈 테니, 볼펜과 종이만 있으면 되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소.”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끄억끄억 웃음을 날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