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가 나왔고, 아버지한테 뒤지게 혼났지요. 난 어쩔 수 없이, 글씨가 안 보여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변명을 했고, 안과를 가게 됐고, 원시라는 판정을 받았고, 안경점에 가서 돋보기안경을 쓰게 된 거라오, 그때부터. 그것 참 이상도 하지, 고2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고3이 되어 그런 현상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말이오, 안 그렇소?”
그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충분히 공감이 갔다. 어떤 일이든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게 세상이다. 의도하고 계획해서 벌어지는 일보다 어느 날 문득 예상치 못한 일이 펼쳐지는 게 더 많지 않을까. 이전 같았으면 반대로 생각했겠지만, 유리가 사라지고 나서 난독증에 지배당한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책을 실은 물류운송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반사적으로 일어났고, 나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일 끝나고, 저녁에 술 한 잔 하시려오?”
그가 걸음을 옮기며 말을 던졌다.
“아, 네, 그러시죠.”
내가 대답을 하자, 그가 캉캉캉 흥겨워하며 웃음을 쏟았다.
“내가 왜 즐거운지 아시오? 오랜만에 함께 술 마실 사람이 생겨서요. 맨날 대학생이나 고등학생 알바들이 며칠씩 일하다 그만두는 통에 영 재미가 없었다오. 이제 좀 숨통이 트이오. 게다가 오늘은 금요일이잖소. 캉캉캉…….”
절로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함께 술 마실 사람이 생겼다는 게 그렇게도 즐거울 수 있다니…….
일하는 시간이 끝날 무렵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도야?”
“네, 아직…….”
“허, 그것 참…… 창고 일은 어때? 할만 해?”
“네, 뭐, 그럭저럭…….”
“왕규는 어때? 일 잘하고 있던가?”
“아, 아시는 분이군요?”
“알다마다. 오래전에 함께 일했었지. 그나저나 말이야, 주말에는 푹 쉬라고. 찜질방이나 온천탕 같은 데 가서 땀을 좍 빼 봐. 그러면 피로가 풀릴 거야.”
“네, 알겠습니다.”
*
왕규는 맥주잔에 소주를 받았다.
그는 물을 마시듯 소주를 들이켰다. 꿀꺽꿀꺽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캬, 일을 마치고 마시는 이 맛!”
나는 기가 죽은 채 소주잔을 기울였다.
“소주는 말이오, 예전에 25도일 때가 진짜 소주였지, 지금은 맛이 너무 밋밋해졌소. 술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게 갈수록 밋밋해지고 있소. 안 그렇소?”
“아, 예…….”
나는 별 생각 없이 맞장구를 친 뒤 소주병을 들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도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안주로 나온 곱창을 몇 점씩 집어먹었다.
“출판사 사장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나의 말에 그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십 년 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일했었지. 학습지를 만드는 곳이었소. 다른 곳에 비해 돈은 많이 벌었지만, 오래 있을 곳은 못 됩디다. 돈 몇 푼 때문에 파벌을 짓지 않나, 이간질을 하지 않나…….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은 잘나가는 사장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있는 거라오. 흐흐흐.”
자조 섞인 웃음을 내비치고서 그가 다시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고, 종업원이 소주를 가져오자 마개를 딴 다음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사업 망하고 대리운전을 하고 있을 때 손님으로 만났지 뭐요. 사업 할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 같소. 내가 먼저 독립을 해서 출판사를 차렸지만 난 망했고, 뒤늦게 출발한 그 친구는 흥하고 있으니 말이오.”
“어떤 종류의 출판사를……?”
나는 조심스레 물은 다음 잔을 비우고 곱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내 잔을 채워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시 전문 출판사였소.”
어이구야, 망할 만도 하군, 싶은 생각이 오물오물 씹혔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문학계는 자리를 선점한 문단의 권력자들이 쥐락펴락하고 있잖소. 난 그런 지형을 바꾸고 싶었소. 문단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아야 시인이 되고 시집을 낼 수 있는 현실의 풍토가 못마땅하다, 이 말이오. 그래서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시집을 내줬소. 인쇄비 정도의 최소한의 비용만 받고 말이오. 대박 나는 시집이 한 권만 나와도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자꾸 빚만 불어나게 됩디다.”
말을 마치고 그는 또 꿀꺽꿀꺽 소주를 넘겼다. 나도 천천히 소주잔을 기울였다. ‘몽상가’ 라는 단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소. 세상 한 번 살지 어디 두 번 삽니까? 난 구질구질하게 비위 맞추며 사는 거 딱 질색이오. 호탕하게 살고 싶소, 돈키호테처럼. 돈키호테 정신! 난 돈키호테처럼 살 거요.”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호기롭게 외치며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모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소주잔을 들어 그의 잔에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