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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현수 Jan 30. 2021

15. "선택해야 하지 않아?"

두 가지 타이틀은 정말 욕심일까




이른바 '부캐'를 키우는 저를 걱정하며 한 선배가 말했습니다. "둘 중에 하나 선택해야 하지 않겠어? 하나만 해도 잘 되기 어려운데.. 둘 다 하려다 커리어 망친다 너. 둘 다 애매해져." 그 선배도 회사를 다니며 시간을 쪼개 공부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병행하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었다는 걸 알지만, 그 말은 두 가지 일 어느 것에도 응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들어 이른바 ‘부캐’, ‘N잡러’라는 말이 하나의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이 깊은 취미나 부수입 수단, 자아실현에 이르는 긴 시소 위에서 웃으며 왔다 갔다 즐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실행에 옮기는 용기까지 있다며 추앙받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끊임없이 돌아보는 저 같은 부류의 사람에겐 그런 허울 좋은 말이 전부일 순 없습니다.



어느 밤에는 심각하게 '이 일은 내게 무엇인가?' 하고 자문했습니다. 작년, 연차가 비슷한 친구 K가 현업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조금이라도 빨리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참 좋다는 소감을 듣고 온 참이었습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라는 귀중한 시기를 맞은 지금, 나는 내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분산해 쏟는 것이 맞을까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거기에 다 쓰는 K와 거기와 여기에 반반 쓰는 나는 3년 뒤 어떤 모습일까? 하는 물음표가 한동안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M은 회사를 떠났습니다. 하루 온종일, 소위 말해 비즈니스 아워를 통째로 회사와 계약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작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원격근무 체제는 이 회의감을 서서히 확신으로 바꿔놨다고도 했습니다. 시간의 주도권을 내가 쥔 채로, 전문 프리랜서이자 소위 'N잡러'로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M은 회사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갔으니 K나 저보다 더 시간을 잘개 쪼개 쓸 수 있고 시간을 쓰는 카테고리의 비율도 더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 M의 실행력과 결단력이 눈 부시게 부러웠습니다.



둘 중 어디에도 무게를 확실히 싣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했던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이따금씩 던지는 질문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럼 회사를 관두는 거야?", "이제 곧 사장님이 되는 건가?", "근데 지금까지의 이력이 좀 아깝다.", "나와보면 회사가 제일 좋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마치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는데 왜 결혼을 안 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아직 어떤 의사결정을 했다고 밝힌 적도 없건만 소위 '딴짓'을 하자 무슨 선언이라도 한 사람처럼 대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목처럼, "이제 결정해야 하지 않겠어?"라며 의사결정을 재촉받기도 했습니다.



취미를 가질 수 없을 만큼 여유 없이 일만 하던 때도 있었고 연봉을 올리는 재미에 일에 탄력이 붙었던 때도 있습니다. 억울하게만 생각된 힘든 시간들이 내 이력이 되고 관계로 남고 평판으로 쌓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식물 디자이너로 전직을 할까 싶은 적도 있지만, 이제 10년을 바라보는 이 커리어를 놓을 생각이 없고 기왕이면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하며 지금껏 쌓인 경험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손으로 식물을 만지는 일, 나무를 계속 공부해야 하며 몇 년에 걸쳐 작업이 진행되는 이 식물 디자인 일이 제 성격과 무척 잘 들어맞는다는 확신도 듭니다.



몇 해 전 해외 출장으로 에어비앤비 숙소를 사용한 친구의 후기가 이따금씩 생각납니다. 숙소 한편에 마련된 책장에 동화책이 몇 권 꽂혀있어 그 책에 대해 숙소 주인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주인은 수줍게 웃으며 자기가 쓴 책이고 자신은 동화책 작가이기도 하다는 소개를 했는데, 회사를 다니며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있다고 이미 소개 받았던 터라 적잖이 놀랐다고 합니다. 벌써 3-4년 흐른 이야기이고 당시에는 모두 '선진국이라 역시 다르다', '워라밸이 무척 좋은가보다' 하며 에피소드를 흘려보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숙소 주인도 본인이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그저 실행에 옮긴 것 아닐까, 어쩌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아주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흑백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작년 재미있게 읽은 책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에서 글쓴이 김호 님은 이것을 '욕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시간 부자(time poor가 아닌 time rich)', 즉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쓰면서 내 삶의 여덟 가지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다.


글쓴이는 '내 삶의 여덟 가지 욕망'을 코치/컨설턴트, 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 읽고 생각하는 사람/쓰고 옮기는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 프로듀서, 독립 연구자,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 여행하고 맛보는 사람으로 정리했습니다. 꿈이나 목표, 비전, 가치관과 같은 먼 말이 아니라 '욕망'이라서 참 와 닿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욕망은 구체적으로 어떤 세부 욕망으로 구성돼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다양하게 행복한 사람들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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