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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현수 Mar 14. 2021

18. 말맛

'식물 디자이너'와 '식물 작업자'



최근 브런치 소개말을 ‘식물 디자이너’에서 ‘식물 작업자’로 바꿨습니다.



식물을 다루면서 가장 낯설고 어려웠던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를 규정하는 일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자신을 규정해주는 말이 이미 존재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말에도 합의가 필요하기에 개개인이 그걸 고민할 필요가 적습니다. 개인이 곧 브랜드일 수 있는 회사 밖 세계에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어떻게 부를지 규정하기에 따라서 ‘크리에이터’가 될 수도, ‘아티스트’가 될 수도, 그도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는 세계입니다. 그에 따라 풍기는 느낌, 나아가서는 정체성이 달라질 수도 있기에 고심하게 될 수밖엔 없습니다.



저는 한 원예가로부터 가드닝을 배운 후 개인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식물들이 쉬는 동절기에는 식물을 만지는 시간보다 이렇게 글을 쓰거나 글을 위한 조사에 들이는 시간이 더 깁니다. 후덥지근해 물 관리만 하기에도 벅찬 여름 역시 작업량은 줄어듭니다. 몇 해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지금과 같은 속도가 맞다는 잠정적인 결론(가지치기 작업의 원칙)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디자이너’라는 표현이 갖고 있는 말맛과 제 작업의 방향성이 얼마만큼 잘 어울리는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처음 ‘식물 디자이너’란 말에 기대 보자 결정했을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작업량이 많았습니다. 식물 생장에도 이롭고 감상하는 아름다움도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무분별하게 가지나 잎을 잘라내 아픈 식물, 몇 가지 조치만 취해주면 나무가 더 건강해질 것이 보이는데 방치돼 있는 나무들이 안타까웠습니다. 당시에는 그 말이 제 작업을 썩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이곳 브런치를 포함하여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여러 플랫폼에 마련한 식물 작업용 계정의 이름은 'hslworks'였습니다. 이름의 이니셜 hsl에 작업물을 뜻하는 works를 붙여 저만의 시각으로 보고 만진 작업물을 가리키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작업물'은 제가 만지고 관리한 식물 그 자체도 포함되지만 글이나 사진 등 식물을 주제로 삼은 콘텐츠도 포함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의 제 활동을 소개말보다 더 잘 담아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작년 봄에는 곧잘 입고 다녔던 옷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질 때처럼, 그때는 저를 잘 보여준다고 믿었던 표현이 지금은 좀 달리 보입니다. '식물의 속도에 발맞춰 오래 지켜보고 신중하게 작업한다'는 저의 작업 원칙을 담아낼 수 있는 브랜드 이름도 새로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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