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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나 Oct 18. 2024

간수치와 독감예방주사와 자립(?)

[이번엔 4기다!] -14.

병원을 가기 전부터 약간 예상은 했었다.

요즘 아주 본격적으로 대학원 졸업 준비를 위한 압박을 거세게 받고 있는 중이라 두통을 거의 달고 살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아주 잠시잠깐 박사에 대한 꿈도 꿔보았으나 나란 사람은 결코 아카데믹하지 않다는 것을 졸업을 위한 글을 쓰며 확실히 느끼고 있는 중. 박사는 무슨. 에라이.)

이 정도의 스트레스라면 지난 4, 5월만큼은 아니어도 몸에 어떤 식으로든 무리가 가해지지 않았을까 조금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검사 결과가 알려주는 간수치 삐용삐용.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드라마틱하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AST 39에 ALT 59.

정상 수준을 40까지로 보고 있으니 AST는 아슬아슬하게 정상 범위고 ALT는 슬쩍 넘어선 수준인데, 지난번에는 이 정도 수치였을 때 간수치 안정화를 위한 약 처방이 추가로 따라왔었기에 '이번에도 우루사 받아가겠군'이라 생각하며 진료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간수치 언급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전혀 언급 없으신 교수님.

간수치 안정권 0점 조준이 다시 맞춰진 것인가 싶지만... 알 길 없는 교수님의 마음과 그 기준.

하긴... 따지고 보면 지금 내 혈액 검사 결과는 주요 지표들 중 정상 범주에 들지 못한 것들이 한 둘이 아니긴 하다.

항암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보는 백혈구 수치도 정상보다 낮고, 호중구 수치는 늘 1200~1300을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인데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휴약기간이 늘어난 적이 없다.

역시 4기 투병 라이프, 내 예상대로 절대 순순히 흘러가지 않는군. 아주 재밌어 응?


원래 나는 진료를 보러 들어가서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교수님의 포스에 졸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권위에 약한 자) 궁금한 것들은 대체로 알아서 잘 찾고 잘 확인하는 편이기도 해서 말이지. 그중 도저히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만 모아뒀다가 질문을 하는데 이번이 그런 날이었다.

메모장에 정리 잘해서, 질문을 하는 시뮬레이션까지 머릿속으로 돌려보며, 짧은 시간 안에 내가 원하는 정보를 취득하기 위한 나름의 플랜을 촤라락 꾸리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최근에 무릎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하는 중인데, 동네 병원에서 세 차례 치료를 받았지만 예후가 그리 좋지는 않다. 이 정도 치료를 했는데도 다시 전과 동일하게 불편한 증상이 지속된다면 무릎 MRI를 찍어봐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이왕 그 정도 수준으로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이라면 현재 진료를 보고 있는 병원에서 진행을 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모든 병력 기록을 전산으로 다 볼 수 있을 테니 내가 굳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 분명하고, 나를 대할 때마다 어렵고 당황스러워하는 동네 병원 의사 선생님의 고충을 덜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배려.(안다. 나 같은 환자를 만날 일이 별로 없으셨을 테니 그분도 얼마나 당황스러웠을 거야.)

빠르게 설명을 하고 "그래서 진료를..."까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더 빠르게 치고 들어오시는 교수님.

"그 병원에서 MRI 찍자고 하면 찍고 치료하시면 돼요. 만약 그 증상이 암이랑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면 본원에서 진료 보실 수 있어요."


약간 당황했지만 굴하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으나... 이것 역시 번째 못지않게 단칼에 툭.

미리 시뮬을 돌린 내가, 그 시간이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모든 상황이 종결되어 버렸다.

그래, 이 맛이었지. 내가 이걸 잠시 잊고 있었네. 깔끔하다 깔끔해.

마지막으로 독감예방주사 맞아도 되는지 물었다. 이건 가부간 결정이 가능한 답변이라 답변 도출 속도도 빠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또 이 질문에서는 순간 정적 발생.

결론은 "가급적 오늘 중으로 빨리 맞으셔라."

백신을 맞으면 한동안 림프절이 붓는데 검사에서는 이걸 암이 진행된 것으로 판단한단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첫 번째 멘트는 "검사 후에..."였었는데, 내 검사 일정이 12월이어서 잠시 "엇"하신 거였다.


그리하여 계획에 없던 독감예방주사까지, 총 4번의 주사를 맞은 후 재빠른 귀가를 선택.

(그 사이 벌어진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갔는데 학교 개교기념일이었던 건'까지 더해져서 심신이 너무 피곤했다.)

원하던 것을 다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유용한 정보들은 모을 수 있었다.

1. 독감예방주사는 반드시 맞아야 하며, 그 시점은 정기 검사 시기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함

2. 현재 내 병과 상관관계가 확실해야만 본원 진료를 받을 수 있음

2번은 혹시나 했던 궁금증을 확인한 거고, 1번은 앞으로 내게 몹시 유용한 정보가 될 듯하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두 번째 질문은 "현재 내 상태에서 어떤 운동을 얼마만큼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를 도와줄 수 있는 곳이 있는가"였는데, 완벽하게 이런 표현을 쓰신 것은 아니나 내 귀에 들린 뉘앙스는 "그건 네가 알아서 잘하렴"이었다. 사실 요즘 내 생활에서 가장 궁금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영역이었는데 이걸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니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다. 재활치료와 운동 처방을 도와주는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건 쉬이 찾아지질 않는다. 본원에 암건강증진센터 같은 곳이 있기에 혹시 나도 그곳을 갈 수 있나 하는 마음으로 했던 질문이었는데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니... 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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