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이 모험인가요?
'모험'이란 단어가 언젠가부터 낯설다.
아직 코를 훌쩍이던 어린 시절, '모험'이란 단어는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TV 속, 만화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항상 미지의 세계에서 모험을 하고 있었고, 그들을 따라 엄마의 장롱에서 보자기 하나 꺼내 목에 묶으면 집 앞에 나가 메뚜기 하나 찾아 헤매는 것도 나에겐 모험이었다.
메뚜기, 올챙이, 개구리, 다람쥐와 같이 대상은 계속 바뀌었고, 그때마다 원정대는 항상 새로 꾸려졌다. 동네 사내아이들은 그 원정대의 대장을 서로 자처하기 바빴고, 버려진 의자를 뒷동산 수풀 같은 곳에 감춰두곤 비밀 기지라며 키득거렸다.
이 기억이 어느 세대에까지 공감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눈매가 나를 닮은 4살 아이가 공벌레를 찾겠다며 풀숲을 뒤지는 것만으로도 모험을 떠난다고 외치는 것을 보면 꽤나 공통되게 가진 기억이고 향수일 것 같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에 남은 아름다운 '모험'의 의미는 점점 바뀌어갔다. 어느샌가 어른이 되자 난 터무니없는 정보에 홀려 말도 안되는 주식을 구매할 때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의미 따위로 '모험'이란 단어를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모험은 낯설고, 씁쓸하면서도 저급하게 변질되었다.
'모험'을 그만두고, '모험'을 시작하다.
사실 사전적 의미의 모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함]인 만큼 지금에 세속적으로 쓰는 의미의 모험이 오히려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모험을 떠나자고 외치는 아이가 떠올리는 순수한 의미의 모험은 왠지 모를 향수감을 가지고 그리움으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꺼내지 못하고 묻어두었던 아이의 모험을 난 스쿠버 다이빙을 배워가며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수중 다큐멘터리'라고 대답할 수 있다. 누군가는 지겹다는 물속 풍경을 나는 왠지 모르게 즐겁게 오랜 시간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난 그런 풍경을 물속에 들어가서 직접 보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상상은커녕 스쿠버 다이빙이란 행위 자체를 나는 아예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둬본 적이 없다. 마라톤을 보며 '황영조'나 '이봉주'를 응원하고, 열광하면서도 마라톤을 직접 하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스쿠버 다이빙도 마찬가지였다고 표현하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심지어 난 물에 빠져 생사를 오락가락한 경험도 두 번이나 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했던 어떤 작은 약속을 계기로 난 언제부터인가 자의로 무거운 공기탱크를 짊어지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스쿠버 다이빙은 어느샌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물에 대한 공포심을 점차 지워낼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낑낑거리며 뱃살을 접어 슈트 안에 몸을 쑤셔 넣는 귀찮음마저도 점차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난 '모험'을 그만두고,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지의 섬으로 떠나는 모험
제주도는 다이버들에겐 마치 성지와 같은 곳이다. 맑은 물과 따뜻한 수온, 그리고 다양한 수중 생물들의 모습은 다이버들의 1순위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해녀 삼춘들이 이야기하는 밤이면 달빛을 받아 물속에서 별들보다 더 반짝거리며 빛났다는 연산호는 제주 본섬의 개발로 인한 황폐화를 겪어 그들의 아련한 눈 속에만 남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제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곤 있다지만, 숙련된 다이버들이 선호하는 것은 본섬보다는 배를 타고 근처의 부속섬으로 나가 다이빙을 하는 것이다. 해안가에서 보던 작은 섬들은 배를 타고 불과 10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고, 그 짧은 거리가 무색하리만큼 바닷속 풍경은 본섬과 달리 형형색색의 산호들과 그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남국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법한 알록달록한 색상의 물고기들은 이국적인 모습으로 '레인보우 울트라 엘레강스 피시'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범돔', '청줄돔', '파랑돔', '아홉동가리' 따위의 구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바닷속 풍경들을 보여주는 제주의 부속섬들 가운데 유독 다이버들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섬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제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비양도다.
제주는 본섬을 제외하면 4개의 큰 부속섬을 가지고 있다. '우도', '마라도', '가파도' 그리고 '비양도'인데, 다른 섬들의 경우 해변, 청보리밭 하물며 짜장면까지 관광 자원으로 개발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변화했다면, 유독 '비양도'만은 유명 해수욕장 앞에서 보이는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 선호도는 다이버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교통이 편하고 난류가 흐르는 길목에 위치한 '섶섬', '문섬', '범섬'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랑받는 것과 달리 '비양도'만은 유독 다이버들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를 물속에 들어가게 만든 술자리 약속의 주인공이자 나의 스쿠버 다이빙 스승이기도 한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비양도에 들어가 보게 넘어와."
야생의 바다
사실 제주는 다이버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인 동시에 다이버들이 마음껏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제주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상 가운데 하나인 '해녀'는 모두가 알다시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될 만큼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이고, 그 해녀들은 제주의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기구를 이용해 물속에 들어가는 다이버들은 국내법상 물속에서 채집 활동을 할 수 없는데, 과거부터 일부 몰지각한 다이버들에 의해 해녀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왔다. 숨을 참고 참아 해산물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해녀들이 보기에 기구를 가져와 물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자신들의 채집 대상을 순식간에 쓸어가는 다이버들이 곱게 보였을 리는 만무하다.
때문에 법적인 문제 이외에도 들어가려는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 해녀, 그리고 그 해녀들이 속한 마을과 어촌계의 신뢰를 쌓고, 허락이 떨어져야만 그 바다에서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게 된다. 제주에는 수많은 다이빙 샵들이 있는데, 상당수가 바다와 떨어져 위치한 이유가 그것이다. 범섬, 섶섬, 문섬의 앞바다가 다이버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지형적 이점과 아름답다는 것이 가장 크겠지만, 사실은 무인도인 까닭에 다이버들과 해녀들의 접점이 크지 않다는 것도 한몫을 하고 있다.
비양도의 경우는 굳이 관광객들이 섬에 들어가지 않아도 만족할 만큼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본섬에 두 개나 마주 보고 있으며, 수많은 해녀들의 생활 터전이기 때문에 극소수의 다이버들에게만 그 속내를 허락한 바다였다. 그리고 수많은 해녀들이 비양도를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수중 생태계가 활발하고,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바다도 있었다.
나의 다이빙 스승인 지인은 비양도가 보이는 월령 포구에서 다이빙 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하고 신뢰를 쌓아 월령 포구 앞바다 이외에도 비양도 앞바다까지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있는 승인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승인을 받은 직후에 비양도 인근 바닷속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디 지점이 다이빙을 즐기기에 좋은지를 미리 답사하는 자리의 처음을 함께한 것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바닷속으로의 모험'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물론 비양도 앞바다가 그동안 폐쇄된 상태로 다이버들에게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몇몇의 이유로 다이버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지라 딱 한 곳의 경로를 통해서만 비양도의 바다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비양도에서 수월하게 다이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지인을 통해 추가된 것이다.
사실 난 부족하다고 표현하는 것마저 민망한 미흡한 다이빙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때문에 나의 합류 목적이 초심자에게 비칠 비양도의 앞바다의 모습에 대한 의견을 받는 것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 불구하고 난 신대륙을 발견하러 떠나는 모험가인양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비양도를 들어가기로 한 첫날은 변덕이 심한 장마 덕분에 하루에 몇 번씩이나 비가 내렸다가 해가 나고를 반복하더니 자욱해진 해무에 비양도가 모습을 감추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 감각을 잃고 배 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이내 배가 멈추니 해무 뒤에서 비양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햇빛을 받지 못한 바다는 깊이가 가늠이 안되게 시커멓게 보였지만, 이내 준비된 다이빙 버디들이 한 명씩 바다에 뛰어든다. 설레는 마음만큼 조금은 긴장을 했나 보다. 배 위에서 비틀거리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온몸으로 밀려드는 서늘한 바닷물의 감촉, 물보라와 함께 일어난 하얀 포말들이 눈 앞을 가리고 사정없이 얼굴을 때린다. 이내 몸이 수면으로 떠오르고 몇 번의 발길질과 함께 배와 멀어지자 입수 신호가 떨어진다. 몸을 지탱해주고 있던 장비의 공기를 빼내고, 물속으로 얼굴을 묻자 시야가 확 트인다.
주위를 둘러보니 시선이 향하는 모든 곳, 모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야의 끝까지 하늘거리는 감태로 이루어진 수초의 평원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를 바쁘게 오가는 수많은 물고기들의 모습이 보인다. 물 밖은 날씨 탓에 색을 잃고 적막한 풍경이었는데, 물속은 대조적으로 참으로 분주하다.
사실 물고기들은 어지간히 다가가서 괴롭히려고 손을 뻗지 않는 이상 사람의 존재를 신경 쓰지도 않는다. 수초 빌딩 숲에서 서로의 일상으로 바쁘던 물고기들의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다.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간다.
그 사이에서 큰 해파리가 펄럭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해파리를 피해 몸을 비틀자 옆으로 바람처럼 무언가가 스친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자 투명한 한치 떼 한 무리가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여느 예쁜 물고기가 산다는 장소로 수많은 다이버들을 따라 들어가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둘러보는 다이빙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곳은 내가 '서쪽 해초 평원'이라 마음대로 이름을 정하기로 했다. 수면에 올라오며 위를 바라보자 잠시 멈췄던 비가 다시 오면서 수면에 톡톡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난 지금 야생의 바다를 모험하고 있다.'
협조: Bids Dive Club(제주 빡빡이 스쿠버), 디스커버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