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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여우 Jun 02. 2024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의 이정모 관장님이 학교 독서 행사에 오셨을 때 학생 한 명이 질문했다. 과학 교양서를 꼭 읽어야 하냐고. 관장님 말씀이 본인 진로가 과학 관련이면 읽지 않아도 된다. 단, 과학과 관련 없는 진로를 선택했다면 일 년에 한 두권 정도는 읽는 것이 좋겠다.라고.


나는 학창 시절에 과학을 싫어했고, 현재 과학과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일 년에 세 권은 과학 서적을 읽기로 했다.


이 책은 문과 남자인 유시민이 과학 책을 읽는 이야기이다. 전제에서 공감이 갔고, 개인적으로 유시민 작가의 깔끔한 문체를 좋아한다.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그동안 본인이 읽은 과학책을 뇌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으로 소주제를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과학 책은 '코스모스'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과학을 소개한 '코스모스'는 각 챕터마다 붙어 있는 소제목이 매우 시적이다. 내가 코스모스를 읽었을 때 이 소제목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를 생각하며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 책도 코스모스의 영향을 받은 건지 소주제가 철학적이다.


그럴법한 이야기와 확실한 진리 (인문학과 과학)

그럴법한 이야기는 인문학, 확실한 진리는 과학을 말한다.

파인만은 인문학자들을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라고 표현했다. 처음에 저자는 그러한 파인만의 의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코스모스'와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자기가 바로 파인만이 말한 '거만한 바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내가 옳다고 믿는 이론이 옳다는 증거가 있는지 여부를 따져보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자신이 거만한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고, 거만한 바보를 그만하기 위해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무엇인가 (뇌과학)

'나는 무엇인가'는 과학적인 질문이다. 인문학적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과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는 뇌다.' 뇌를 떠나서는 철학적 자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유욕부터 경쟁심, 구애 행동,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예술적 창조, 낯선 것에 대한 경계, 자존감, 불안, 공포, 외로움, 복수심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자아의 모든 감정과 생각은 뇌가 작동해서 생긴다. 뇌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모르고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이해할 수가 없고,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을 모르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말한다. '나는 뇌다.'  (p 48)

뇌는 생존을 위해 조합한 기계이다. (p 54)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생물학)

다윈의 이론을 우파는 오용했고, 좌파는 배척했다.

우파는 진화론을 오남용 했다. 영국 철학자 스펜서는 '사회다윈주의'를 창안해, 부자와 권력자는 사회 환경에 잘 적응한 사람이고 가난과 무지는 적응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약육강식은 사회적,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며 사회 발전을 위해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소멸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다윈주의는 '열등한 개체'를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한 골턴의 '우생학'과 결합하고, 전체주의 사상과도 결합하여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이념의 도구가 된다.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의 종착점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였다. 지금도 우파는 집단을 생존경쟁의 단위로 설정하고 다른 민족 또는 국가의 구성원에 대한 적대의식과 혐오감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우파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좌파는 다윈주위를 배척했다.

유시민은 문과 이과를 떠나 정치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그가 과학 이론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과학을 정치인의 관점에서 분석한 이런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이기적 유전자

모든 생물의 DNA는  똑같이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DNA는 우아하게 맞물린 한 쌍의 나선형 뉴클레오티드 사슬이다. '불멸의 코일'을 만드는 뉴클레오티드는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 G(구아닌)이라는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생명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연결 순서만 다를 뿐, 모든 동식물의 DNA는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

모든 생물의 DNA가 동일한 알파벳으로 씌어 있다는 사실은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입증하는 유전학의 증거다.
(p 118~119)

모든 생물의 DNA가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는 것을 안 뒤로 저자는 '존재의 고독'을 덜 느끼게 되었으며 나무가 살고 죽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물이 얼어 팽창하면 세포가 터진다. 죽지 않으려면 겨울 여행을 잘해야 한다. 동물은 세포에서 당을 태워 열을 내지만 식물은 다른 방법으로 추위를 견딘다. 겨울이 다가오면 잎에 보내던 수분과 영양분을 끊는다. 그래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우리에게 가을의 정취를 선사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p 120)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화학)

저자는 수학 재능이 없어서 문과가 된 것뿐 아니라 물질의 변화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고 한다. 소금이 물에 녹는 현상이 왜 그런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뒤늦게 소금이 왜 물에 녹는지 이해하게 되었을 때, 놀라움과 짜릿함을 느꼈다고 한다. 원소, 원자, 분자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원자의 결합인 공유 결합, 이온 결합을 통해 소금이 물에 녹는 현상을 설명한다. 공유결합인 '분자화합물'은 부드러워서 액체나 기체가 많으며, 이온결합이 만든 '이온화합물'은 고체인 경우가 많다. 물은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2개가 전자 두 쌍을 공유한 분자화합물이다. 원자의 구조와 전자의 운동으로 소금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나 역시 그동안 주변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이 없이 살아왔다. 과학적 이해는 세상을 더욱 다채롭게 보여주고, 새로운 흥미와 즐거움을 준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물리학)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별에서 왔다. 빅뱅에서부터 지구의 종말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주제에서 고갱의 마지막 대작이었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연상되었다. 고갱의 답은 '우리는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


저자는 빛과 전자가 입자이고 파동이라는 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성이론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를 쥐어짜서 고전역학을 일부 '이해'했지만,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냥 받아들인다. 그렇게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나도 과학서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다 이해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그냥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책 읽기가 더 즐거워졌다.


양자역학, 불교, 유물변증법

세상의 많은 종교와 윤리 도덕 강령 중에서 과학적 진리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법은 붓다가 깨달은 보편적 진리로 그 자체가 과학이다.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분포는 어느 쪽이 먼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다른 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를 결정한다. 둘은 상호의존 관계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어떤 사물도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 독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p 235)
석가모니와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샤키아 모니(샤키아의 성자)와 붓다(깨달은 사람)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중국 글자 말을 우리 식으로 읽어 한글로 적은 것이다. (p 237)

'지극히 사적인 네팔'에서 수잔 샤키아는 석가모니가 본인과 같은 샤키아 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살아있는 여신이라고 불리는 쿠마리도 샤키아 가문에서 선발한다. 수잔의 여동생도 어린 시절 쿠마리의 후보가 오르기도 했었다. 이렇게 보면 석가모니도 꽤 인간적이다.


우주의 언어인가 천재들의 놀이인가 (수학)

영국 수학자 하디는 수학을 하찮은 수학과 진정한 수학으로 나누었다. 하찮은 수학은 초급 수학 또는 응용수학으로 유용하지만 지루하고, 진정한 수학은 고등수학 또는 순수수학으로 아름답지만 무용하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것은 하찮은 수학이지만 아름답고 무용했다. 또한 진정한 수학의 일부는 선과 악을 행하며 전쟁에서 많이 쓰였다. 즉, 하찮은 수학과 진정한 수학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의 이름값

이 책은 교내 교사 독서모임에서 공통책으로 함께 읽었다. 유시민 작가의 이름값으로 나온 책일 뿐 기대만큼은 아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는 등 대체적으로 비판적이었다. 문과남자가 읽은 과학책답게 본인의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상당 부분을 과학적 내용을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는 점이 아쉽다.

그래도 내가 과학책을 읽어야 하는 당위성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고, 앞으로 읽고 싶은 과학책이 많이 생긴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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