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내가 너무 좋아하는 부암동에 위치하고 있다. 대중교통이용은 다소불편하지만, 지하주차장이 잘 되어 있고 2시간까지 무료 이용가능하다.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감 가는 제목이다. 암 파인 앤쥬? 이번 기획전은 서울미술관 소장품 전으로 우리나라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과 글, 편지를 함께 전시하여 예술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김정희 행서대련
전시의 시작은 김정희의 행서 대련이다.행서는 정형화된 글씨인 해서를 약간 흘려 쓴 글이고,
대련은 동일한 형식으로 대구를 이루며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글씨를 말한다.제주도 유배 중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의 심정을 쓴 글이라고 한다.
신사임당 초충도
신사임당의 초충도도 여러 점이 있었다.신사임당의 그림은 대부분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전작이다. 낙성관지가 없는 이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대상을 겹쳐지지 않고 독립적으로 표현하는 점에서 아마추어적인 측면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세부 묘사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초충도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신사임당은 안견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와 포도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전시 작가 패널
오른쪽부터 김창열, 서세옥, 김환기, 정상화
넓은 공간에 나란히 늘어선 대형 작품이 그 자체로 위엄이 있어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관람자를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는 관람자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오른쪽부터 물방울 화가 김창열,
동양화가 서세옥의 '군상'. 천으로 한옥을 짓는 작가, 인천공항에 전시된 작품의 주인공 서도호 작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도슨트께서도 가까이 가기 부담스럽다는 김환기 작품 '십만 개의 점'.
정상화의 단색화 작품들 '무제' 셋.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우환 작품이 있다. (위 사진에는 없지만)
이대원 '배꽃'
겉으로 보기에 행복한 삶을 살았던 화가 이대원의 '농원-배꽃'은 그의 내면에 숨겨진 고독과 슬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대원은 큰 과수원이 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법대를 나왔고, 의사 부인이 있고, 심지어 잘생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고,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그는살기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 속 따뜻한 색채는 힘든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대원이 쓴 글
직업을 가진 아내를 둔 남편은 아내의 일도 자신의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이대원의 글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결혼한 1945년에는 꽤나 진보적인 남편이었을 것 같다.
김환기가 아내 김향안에게 보낸 편지
김환기 작품 맞은편에는 김환기가 아내 김향안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나의 향안에게.
나의 사람 동림이.
엄청난 애정이 느껴진다.
김향안은 필명이고 본명은 변동림이다. 변동림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의 아내였고, 이상이 세상을 떠난 후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재혼 후 김환기의 아호인 김향안을 따 필명으로 사용했다. 그녀는 수필가이자 서양화가이기도 했다. 시인과 화가, 두 천재 예술가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두 천재 예술가를 먼저 떠나보낸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천경자
'미인도'표절논란이 있었던 천경자 작품도 있다.
이우환 'Dialogue'
일본에서 활동하며 모노파를 이끈 한국 화가 이우환 대형 작품을 전시한 '무한의 공간'이다. 빈 공간에 이우환 'Dialogue'만 전시되어 있다. 종종 모노파와 우리나라 단색화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나는 두 양식이 서양 미니멀 아트와 같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서로 다른 미학을 추구하며 발전한 독립적인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이중섭의 사랑과 우정'코너로이중섭이 아내와 아들에게 보낸엽서화와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이중섭 편지화
특히, 미공개 편지화를 최초로 공개했다고 한다. 일본에 있는가족을 그리워하며그림과 함께 쓴 편지가 인상적이었다. 추운 겨울 친구가 보내준 따뜻한 잠바를 입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다.
아빠는 잠바를 입고 열심히 그리고 있답니다. 아빠 힘내세요! 힘내세요!
'아빠 힘내세요!'라는 말이 이중섭 스스로에게 하는 절박한 외침처럼 들린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을 그의 고통스러운 삶에 마음이 아팠다.
석파정
1층은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층은 현대 작가의 미디어 아트 전시가 있고, 3층에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석파정 정원으로 가는 문이 있다. 미술관 3층으로 나오면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석파정 초입
석파정은 조선후기 문신 김흥근의 별장이었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인수하여 별서로 사용하던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고아원과 병원 등으로도 사용되었고,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12년 복원 후 미술관과 함께 공개했다. 석파정 복원에는 정영선 작가도 참여했다고 한다.
석파정 사랑채. 흥선대원군 초상화가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석파정은 문신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본인에게 팔라고 계속 청했다. 김흥근이 거절하자 그럼 하루만 묵자고 간청했고, 차마 그것까지는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해 주었다. 흥선대원군은 그 밤 고종을 석파정으로 불러서 하룻밤을 자게 했다. 그리고 왕이 머문 곳을 신하가 지낼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석파정을 강취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별장을 빼앗긴 김흥근의 심정은 어떠하였을지... 제대로 대가는 지불했을지 궁금하다.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초상화 복제품이 걸려있다.
석파정
석파정은 정원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계곡 위에 돌로 만들어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기둥과 지붕이 청나라 양식으로독특한 형태이다.
석파정 별채
별채에서 고종이 묵었던 방이다.
석파정 별채
고종이 머무른 방 툇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지금도 전망이 좋지만구한말, 높은 건물이 없을 때는 더 멋있었을 거 같다.
별채 뒤뜰 패널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기록된 내용이 적혀 있다. 나에게 황현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채용신 '황현'
석파정 전경
사립 미술관이라 성인은 이만 원, 학생은 만 오천 원으로 입장료는 비싼 편이다. 월, 화는 정기 휴일이다. 그래도 방문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 날 너무 더웠는데 날씨 좋을 때 또 가고 싶다. 특히 가을 단풍이 아름다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