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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May 03. 2020

떡볶이는 음식이 아니다  기다리는 방법이다.

남편은 입맛이 없거나 혹은 잘 먹고도 뭐가 더 아쉬울때 떡볶이를 찾는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그는 그것이 영혜가 만든 <닝닝하고 싱거울>지라도, 길거리에서 파는 <니맛도 내맛도 아닐>지라도 심지어 냉동식품에서 선사하는 <단짠의 끝판왕>이라 하더라도 맛있다고 말한다.

떡볶이의 참맛을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 음식이 어떻게 생겨야 ‘진짜’맛인지 모른다. 그 음식의 계통과 정통을 알 수 없기에 그렇다.

남편은 유년 시절 부산에서 십오년을 살았다. 십오년이란 아무것도 기억못할 나이에 시작했어도 사내 아이의 어깨가 넓어지고 콧수염이 나버리는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십오년은, 문득 그 사내 아이를 돌아본 부모가 아들에게 더이상 이래라 저래라 하기가 망설여지는 긴 시간이다.


남편의 부모님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지만 가정에 할애하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부산에 정착하려고 애쓴 타향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먹고 살기란 지난했다.

남편에겐 아래로 동생이 둘 있었고 집을 비운 부모가 두고간 약간의 돈과 지루한 시간을 형제들과 함께 사용해야했다.

그는 동생들을 데리고 떡볶이를 자주 먹었다. 아직도 부산에서만 통용되는 특별한 셈 방식 ( 아줌마! 오뎅 두개 떡볶이 두줄 먹었어요. 여기 얼마.하고 소비자가 알아서 셈하고 지불하는 방식. 말하자면 세개 먹고도 두개 먹었다고 말하게 되는 셈법에 눈을 뜨는 방식) 에 비상해졌다. 게다가 동생들 몫까지 셈하느라 떢볶이를 먹으면서도 머리를 굴리느라 매우 바쁠 수 밖에.

안봐도 훤하다.

그는 떡볶이 한입 베어물고 몹시 매운 나머지 졸이고 졸여진 오뎅국을 사발로 들이킬 것이다. 간장과 미원으로 졸여진 오뎅국이 짜서 또 맹물을 왈칵왈칵 마실 것이다. 떡볶이 네 개를 먹고 세 개만 먹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아줌마의 시선을 끊임없이 살필 것이다. 남은 돈으로 오락실까지 갈 수 있을지 아니면 동생들을 데리고 디저트로 딸기맛 쭈쭈바까지 사먹을수 있는지 주머니 안에서 공글리던 동전을 수도 없이 세워 볼것이다.

그래서 떡볶이는 몇 개만 집어 먹어도 배가 너무 부르다. 오뎅국물과 맹물과 떡이 서로가 서로 위에 올라타느라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부풀어 오른다.


다행히, 부모가 돌아오는 저녁이 되면 헛배는 저절로 꺼졌다. 부모를 기다리느라 종일 애써야했던 마음도 풀이 죽어 노골노골 해졌다. 따뜻한 쌀밥과 도다리를 넣은 미역국과 잘익은 총각 김치를 그리고 한끼도 빠지지 않고 늘 상위에 올라오는 자반멸치볶음들을 지루하게 만끽하고 밥상을 물릴 수 있다.

밤은 늘 똑같이 내려오고 그리고 내일 다시 떡볶이를 찾는 시간으로 어김없이 올라간다. 허겁지겁 벌컥벌컥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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