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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Y Mar 20. 2019

승리의 몰락에 대한 단상

세상일이 쉽고 자연스럽다고 믿어질 즈음, 다시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거지...

  드라마 <미생>의 한 대사이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승리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다 이 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인기 가수를 넘어 젊고 유능한 사업가로 유명세를 떨치던 승리의 몰락을 보며 나는 성공의 정점에 서 있던 승리와 그의 친구들, 이른바 ‘영 앤 리치’ 무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봤을지 궁금해졌다. 내가 직접 체험해 볼 수 없는 이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며 문득 배우 김희원 씨가 연기한  <미생>의 ‘박 과장'이란 캐릭터가 떠오른 것이다.


  박 과장은 회사의 이윤을 빼돌리다 발각되어 회사를 떠나게 되는 인물로 시종일관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보는 내내 시청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악역이었다. 그의 외모나 성격, 그가 저지른 비리의 내용 어느 것도 승리와의 공통점은 없다. 하지만 박 과장이 타락해가는 과정과 심리의 변화가 왠지 승리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박 과장은 원래 매우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큰 공을 세우고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허무감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거래처에서 자신에게 몰래 찔러준 뒷돈을 받게 되고 이를 시작으로 점차 돈의 맛을 보게 된다. 죄책감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거래처에 리베이트를 요구하던 그에게 누군가가 제안한다. "스케일 있게 해야지! 그냥 현지 허름한 업체 하나 인수해 버려. 여기서 자네가 영업하는 대로 다 자기 돈이라고!” 이때가 바로 박 과장의 눈이 뜨인 순간이었다. 그에게는 그 순간이 일종의 ‘깨달음'처럼 다가온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거칠게 없어진다. 업무 태만을 일삼고 동료들을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주인공 오 과장과 함께 추진하던 해외 사업에서 직접 현지 업체를 인수해 회사의 이윤을 빼돌리려다 덜미가 잡혀 회사를 떠나게 된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후 오 과장은 성실했던 박 과장이 변해갔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습지도 않았겠지... 세상 일이 쉽고 자연스럽다고 믿어질 즈음, 다시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거지..."




   그렇다. 승리, 그리고 그와 함께 사업하고 어울려 다니던 그들의 눈에도 세상 일은 너무나 쉽게 보였을 게다. 그들 역시 어느 순간 ‘박 과장’처럼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 ‘깨달음’을 얻은 순간 돈을 버는 일은 너무도 쉽다. 클럽을 차리고 VIP룸에 부자들을 초대하고, 여자를 소개해주며 친분을 쌓는다. 그들이 투자한 돈으로 사업을 키우고 인기 예능에 출연해 돈을 받으며 사업을 홍보한다. 이쯤 되면 그에게 사업이란 가장 재밌는 놀이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각종 불법과 부도덕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믿어질 때쯤, 결국 한순간에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몰락이 더욱더 씁쓸했던 것은 그가 가수로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따랐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습생 시절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 ‘빅뱅'으로 데뷔를 하고, 넘쳐나는 아이돌 가수 사이에서 살아남아 이른바 전설적인 케이팝 그룹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 그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부와 명성을 쌓고 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주위에는 그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부자들과 여자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인생의 추월차선'이 열렸다고 확신한 순간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을 것이다.


  <미생>에서 박 과장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 때, 그는 분주하게 일하는 다른 직원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오 과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뭐 저렇게 대단한 일 한다고 바쁜 척 들인 지... 그렇죠?”


  승리와 그의 무리도 바쁘게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미생>의 박 과장과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아등바등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보며 “우습지도 않다”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저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인생의 추월차선’을 탄 것도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저 알량한 꼼수를 부려 갓길을 내달렸을 뿐이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 인생의 최대의 위험은 무언가 깨달았다고 느끼는 확신의 순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확신이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내기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신의 한 수>의 한 장면에서 안성기 씨가 연기한 맹인 바둑꾼 ‘주님’은 인생을 바둑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이 고수에겐 놀이터요, 하수에겐 생지옥 아닌가...”    


꼼수를 실력이라 착각하고 세상을 놀이터쯤으로 여기던 그들은 결국 지옥으로 추락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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