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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Apr 05. 2023

작디작은 도쿄 여행

중년의 딸과 노년의 엄마의 3박 4일

얼마 만의 여행이던가? 2019년, 유럽이 역사상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던 이상기온 뉴스가 가득했던 여름. 타는 듯한 태양 아래, 기록적 더위 속에서 10회 어반스케쳐스 심포지엄을 참석하며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그림을 그렸던 것 이후로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등 좋아하는 대도시를 여러 번 방문하는 여행을 훨씬 선호하지만, 일 년에 한 번 낯선 도시에서 그림을 그리는 도전도 한껏 긴장하는 만큼 매력적이라 생각했었다. INTJ라 수많은 낯선 타인과 교류하는 것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지만, 벽을 깨면서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달까? 아마도 스스로는 선뜻 선택하지 않았을 싱가포르, 맨체스터, 포르투, 암스테르담에서 담았던 기억들과 함께 자유롭게 누빈 펜 끝의 자취들이 그날의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홍콩사태로 그다음 해 11회 어반스케쳐스 심포지엄은 취소되었고, 대신 계획했던 2020년 3월 '파리와 포르투' 여행 또한 COVID-19로 예약한 일정이 모두 허탈하게 환불처리 되었다.


4년이 흘러 2023년 어반스케쳐스 심포지엄은 4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다. 아직까지는 운전을 못해서 불편한 점이 없어 두 번이나 갱신한 운전면허증은 신분증으로만 사용하는데, 차를 렌트를 해서 대자연을 자유롭게 누릴 수가 없는 장롱면허인 내겐 오클랜드가 끌리지가 않았다.


"벚꽃필 때 즈음 도쿄 참 좋았었지? 꽃 피는 봄날 도쿄여행 갈까?" 엄마와 가끔 가벼운 얘기를 나눴었다. 그러다 피아노를 전공하신 엄마가 오랫동안 조성진과 임윤찬 공연예매를 부탁했었는데 그때마다 성의 없게 “벌써 다 매진이네.”라는 답변을 했던 게 마음에 걸리던 찰나에, 임윤찬 전 세계 투어를 따라다니는 팬들의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그냥 무심코 구글링을 해보니 제일 가까운 도쿄의 2월 중 3일 공연 모두 자리가 넉넉히 남아 있어 엄마에게 의사를 물어본 것이 이번 여행의 계기가 되었다.


산토리홀이라! 멋진 공간 속 자신이 작은 점처럼 작게 자리할 때 가장 큰 감동을 느끼는 내겐 오랜만의 여행 계획이 설렌다. Google Docs에 해야 할 일들과 일정계획과 PLAN B, C, D를 한가득 적어놓고, 구글맵과 트리플 앱을 통해 한번 더 동선을 더블체크했다. 3차 코로나백신 영문예방접종증명서 준비, VISIT JAPAN WEB등록, 트래블로그 카드 발급, 노을 시간에 맞춰 '시부야스카이' 전망대 예약, SKT 로밍 'Baro'가입, 친구가 감탄한 KOFFEE MAMEYA -Kakeru- 커피코스 예약을 했으나, 예전에 비하면 정말 너무 간소해진 일정이다.

여행할 땐 마치 수행하듯 하루에 2-3만보씩 걷다 보면 일상의 잡념을 떨칠 수가 있는데, 올해 칠순이 된 엄마와 함께하는 여행이기에 비우는 법을 배운다. '중년의 딸과 노년의 엄마의 3박 4일'은 동선도 걸음도 모두 작디 작고, 대신 여유와 여백이 주는 행복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의 작은 여행이 시작이다.


DAY 1

모바일체크인하고 위탁수화물이 없으니 절차가 너무 간편하다. 정말 오랜만에 인천공항.

서울 / 인천 ICN 12:35 PM->도쿄 / 나리타 NRT 02:55 PM


여유롭게 점심에 출발해서 오후에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는 일정을 골랐다. 예전보다 절차가 간소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행객으로 붐비는 공항의 검역수속, 입국심사, 세관신고를 QR코드로 확인하는 시간도 상당해서 1시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세관신고 끝나자마자 나오는데 미니스톱이 보여 엄마가 목마르다고 생수를 사자고 했다. '한국은 애플페이가 담달에나 되려나?' 2월만 해도 아직 애플페이가 한국에서 안될 시기이고, 스이카앱에 새로운 한국신용카드 등록이 되지 않아,

"ここで スイカチャージ できますか?"

다행히 블로그에서 봤던 게 생각나 버퍼링 없이 편의점에서 스이카 충전완료!

Nex 티켓 살 때 꺼낸 동전지갑. 아직도 동전을 많이 쓰는 신기한 나라.


JR Travel Service Center에서 나리타 익스프레스 티켓을 사는데 탑승시간이 10분 뒤다. 서둘러 플랫폼으로 가서 착석을 하니 어느새 노을 진 하늘이 어둑하다.



도쿄의 어느 지역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이번에도 마루노우치로 결정했다. 도쿄역이 있어 교통도 편리하고, 신주쿠나 시부야에 비해 인파에 압도되는 느낌을 조금은 피할 수 있다. 동네를 거닐 때 청결하게 정돈되고 세련된 느낌도 마음에 든다. 예전 여행에서 도쿄스테이션 호텔이 너무 만족스러웠지만, 이번엔 좀 가성비가 괜찮은 마루노우치 호텔로 정했는데 도쿄역 M8-M12 출구 방향으로 걸어가면 지하로 호텔 연결되어 있어 편리했다. 지하출입구 바로 앞에 뉴욕에서 좋아했던 City Bakery가 있고, Family Mart도 있다.

마루노우치 호텔 | Marunouchi Hotel 丸ノ内ホテル

철로와 도쿄역, 키테까지 보이는 뷰도 낭만 있고, 무엇보다 직원들이 너무 친절하다. 특히 체크인 담당해 주신 한국인직원분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상 1층과 6층 그리고 지하 1층이 Marunouchi Oazo [ 마루젠서점, 스타벅스, 식당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도 편리하고. 참, 일본 특유의 선을 이용한 디자인도 좋았다.

Hitsumabushi Bincho Tokyo Marunouchi Building (うなぎ ひつまぶし名古屋(なごや) 備長(びん-ちょう) 東京丸ビル店)

체크인을 마치고 나오니 하늘이 벌써 깜깜하다. 도쿄에서의 첫 끼는 호텔 근처 마루노우치 빌딩 6층에 있는 히츠마부시 빈쵸로 정했다. 아무래도 여행의 꽃은 그 지역의 식도락을 즐기는 것일 테니, 웨이팅 없이 앉아 따뜻하고 달달한 장어를 맛보니 여행의 노곤함이 사르르 녹는다. 1/3은 그대로 즐기고, 1/3은 고추냉이를 곁들여 먹으면 찡한 알싸함이 비릿함을 잡아준다. 나머지 1/3은 와사비, 김, 파, 찻물을 부처 오차즈케로 즐기는 방법이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저녁 식사 후 걷는 도쿄역의 주변 야경은 익숙하면서도 이국적인 거리라 하염없이 걷고 싶어 진다. 여행자의 시선으로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한참을 걷다가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 도쿄역 지하의 작은 상점 Traveler's Factory로 들어선다. 트래블러스 팩토리는 2017년 처음 도쿄를 방문했을 때 알게 되었다. 미츠비시 1호관 미술관이 공사로 문을 닫아서 마루노우치 브릭스퀘어 구경하고 근처에 우표라는 뜻의 KITTE 건물이 예뻐서 우연히 들어갔다가 Traveler's notebook이 각인된 가죽노트를 구입했었는데, 여행지에서 발견한 여행자의 소품이 시간이 지나도 좋았다. 그래서 2018년에도 나리타공항점에서 하나, 도쿄점에서 하나 더, 2019년엔 Starbucks Reserve Roastery Tokyo에서 하나, 그리고 2022년 서울에서도 한정판 하나. 욕심쟁이처럼 수첩을 수집했다.

Traveler's Factory 東日本東京駅地下 1 階改札外 | 도쿄역 마루노우치 지하 북쪽 입구 근처

올해는 더 이상 과욕을 부리고 싶지 않아서 속지 하나만 구입해 도쿄역 지점의 스탬프를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대신 The First Slam Dunk를 관람 후 슬램덩크 일러스트레이션 책을 소장하고 싶었다. 슬램덩크의 선명한 기억이 전무한 40대이지만 흐릿한 추억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스케치가 사각 소리와 함께 다섯 캐릭터가 전진하는 오프닝은 심장이 쿵쾅거리도록 멋졌다. 자막을 선호하는 편이라 망설임 없이 자막판을 선택했는데, 귀로 듣는 원작의 이름과 자막의 강백호, 서태웅, 송태섭, 정대만, 채치수의 괴리감은 전혀 없었다. 기억 속에는 그들은 여전히 한국이름을 담았기 때문이다.

마루비루의 츠타야서점엔 재고가 없었고, 마루젠 서점은 방대한 책에 둘러싸여, 직원의 도움 없이는 일어를 모르는 내가 책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책을 바쁘게 정리하던 직원이 잠깐만 기다리다며, 종이에 책이 위치한 섹션을 적어줬는데, 높은 선반의 제일 꼭대기에 꽂혀있어 한참을 헤매다 책을 겨우 찾았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큰 서점의 구석이라 직원들은 보이지 않고, 헤매며 여기저기 둘러보다 바퀴 달린 이동식 계단을 발견하여 겨우 구매 성공. 게다가 이렇게 커다란 서점에도 딱 한 권 남은 책인지라 이번 여행의 소소하고 큰 행복이었다.

MARUZEN Marunouchi

DAY 2

おはようございます.

서울보다 기온이 많이 높길래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뜻하게 고르고 외투를 걸쳤다. 그러나 아직 2월이다. 쌀쌀했지만 한낮이 되면 따뜻해지겠지?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엄마의 외출준비를 기다리다 계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일정을 짤 때 참고했던 블로그에서 오픈 시간보다 15-20분만 일찍 가면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다는 글을 읽어서 여유를 부리며 거리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여행은 항상 계획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했을까?   

代官山町 다이칸야마

그냥 다이칸야마에서 엄마가 좋아하시는 Ivy Place로 갈걸. 오픈 15분 전에 도착한 '고항야 잇신'에는 이미 대기줄이 길다. 얼마나 기다릴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맛있나? 웨이팅 줄이 미미하게 줄어들 때마다 미련한 오기를 부린다.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아깝고, 플랜 B도 아마 웨이팅이 있을 것 같고, 설마 오래 기다려도 1시간이면 되겠지? 했는데 1시간 40분을 기다렸다. 식당이 지하에 위치한 데다, 그늘진 계단참에서 움츠려 들다 오들오들 떨었더니, 배고픔도 잊었고 입맛도 잃었다. 맛이 없진 않지만, 기다림에 비한다면 그저 평범한 일본가정식처럼 느껴졌다. 기다림에 딱 하나 좋았던 점은 다이칸야마의 수많은 멋쟁이들과 산책하는 예쁜 강아지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Isshin Daikanyama ごはんや一芯 代官山(だいかんやま) | 부타노가쿠니 豚の角煮

속상함을 뒤로하고 가장 좋아하는 츠타야 서점으로 넘어왔다. 타국의 서점에 오면 언어의 한계에 초라해져서 사진 많은 아트북만 대강 겉핥기로 보아 넘기지만, 예쁜 책들에 둘러싸여 걷는 시간은 든든한 행복의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영어, 프랑스어, 일어로 책을 읽을 노년이 오기를 게으른 희망을 품고!

Tsutaya Books Daikanyama 代官山(だいかんやま) 蔦屋書店(つたやしょてん)

원래 둘째 날 계획은 츠타야 서점을 둘러본 뒤, 디저트로 Sahsya Kanetanaka 茶洒 金田中 에서 예쁜 겨울한정메뉴, 이치고다이후쿠 いちごだいふく [苺大福]를 먹는 것이었으나, 점심일정이 지연돼서 포기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Ivy Place도 만석, 츠타야 스타벅스도 인파로 바글바글. 츠타야 라운지에 웨이팅 걸어두었으나 엄마가 찾는 케이크메뉴가 없고 다이칸야마를 헤매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의 치즈케이크가 주는 휴식의 달콤함이 참 감사했다.

VERMICULAR POT MADE DELI

쿄의 겨울은 해가 일찍 저문다고 했다. '시부야스카이'를 오후 4시로 예약했는데 4시 반이 넘어서자 파란 하늘에 붉은 색조가 더해 어떤 예술보다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낸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다. 게다가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보는 노을은 뭉클하다. 채하[彩霞]와 어우러지는 도시의 풍경이 너무나 근사해서, 뻔한 관광지라고 스킵했더라면 후회했을 것이다. 인생의 기복처럼 실망과 감탄의 업 앤 다운을 하루에 담았지만 하루의 하이라이트가 해가 지는 풍경이라 더할 나위 없었다.

Shibuya SKY

유심 구입대신 혹시 몰라 로밍을 해갔더니 시부야 스카이에 있을 때 (목요일 오후) 클라이언트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틀 동안 끝내야 하는 긴급 프로젝트. "어쩌죠? 지금 도쿄인데, 토요일 저녁에 돌아가요. 일요일 하루 동안 작업해서 월요일 오전에 보내드릴게요. “ 여행이 끝나가니 한국 가자마자 하루 밤샐 생각에 체력이 걱정. 열심히 놀고, 돌아가서 열심히 일하자!

Tonkatsu Suzuki とんかつ 寿々木(すずき) | 저녁은 도쿄역 키친 스트리트에서 고른 돈카츠 스즈키에서 가츠동 (かつ丼)
일본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편의점 간식 겸 야식



DAY 3


도쿄에 올 때마다 사는 7-Eleven 계란샌드위치는 변함없이 맛있다. 촉촉한 계란샌드위치로 세 번째 날 아침을 연다.


7-Eleven Japanese Egg Salad Sandwich, たまご サンド. 美味しい!


최근에 두 번 연속으로 도쿄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어디가 가장 좋았어?라고 물었더니, 커피 마메야 카케루점을 추천해 주었다. 마메야는 콩, 원두라는 뜻이고, 다양한 원두가 로스팅의 정도에 따라 진열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 선택하여 커피 테이스팅 코스를 즐길 수 있다. 커피의 기원, 맛, 프로파일, 브루잉방법과 스몰토크를 하얀 가운을 입은 바리스타와 한 시간가량 대화하며, cold brew, milk brew, filtered coffee 그리고 latte와 espresso를 Kashi라고 불리는 작은 디저트와 페어링 해서 준다. 따뜻한 친절함이나 과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고, 일어를 하지 못하면 영어로 대화를 얘기해 준다. 나는 커피를 잘 몰라서, 기본 코스인 Raspberry Candy로 골랐고, 엄마는 산도가 있는 Sagastume Geisha라는 원두를 골랐는데, 둘 다 맛볼 수 있게 나누어 주어서 더 좋았다. 커피를 모르는 내게도 신비롭고 융숭하게 근사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엄마도 한 시간 내내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던 시간. 바리스타가 한국말을 섞어서 대화를 해주신 게 기분이 좋아, 자리를 일어서면서 "おかげさまで私たちは幸せでした。"라며 뺨은 불그레해지고, 버벅거리며 말했지만, 감사했던 마음이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KOFFEE MAMEYA -Kakeru

바리스타가 이후 일정을 물어보길래, "오늘 저녁에 산토리홀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 임윤찬 공연을 보러 가요."라 답했더니, "와! 정말 신기하네요. 어제 온 한국손님도, 똑같은 대답을 했었어요."라고 했다.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려나?


Ginza Sushiko 銀座寿司幸本店丸ビル店 | お昼のメニュー / にぎり set

점심으로 마루비루 35층에 위치한 긴자스시코로 가서 가벼운 초밥코스를 먹은 후,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긴자를 구경하기로 한 일정을 스킵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이렇게 기분 좋은 서프라이즈가!

2/24. 임윤찬의 3번의 도쿄 공연, 오페라시티 콘서트홀, 분카무라 오차드홀, 산토리홀 중 유일하게 아는 공연장인 산토리홀로 정해서 공연날이 우연히 엄마의 서류상 생일과 겹쳤다. 사실 엄마의 생신은 음력 2월 24인데 7살에 미리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외할머니가 양력으로 바꿔 기입하셨었다. 여권을 보고 호텔에서 준비해 주신 샴페인을 엄마가 신기해하신다. 우리 둘 다 술을 마시지 않아, 감사한 마음만 받겠다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길을 나섰다. KITTE에 들러 조카들 선물을 고르고, 좋아하는 브랜드 Hacoa 매장도 구경하고, 두근두근 기다리던 산토리홀로 출발.

Suntory Hall サントリーホール
시티 베이커리에서 임윤찬 공연을 기다리며
Yunchan Lim played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 flat major "Emperor", Op.73 at Suntory Hall.

뭐든 깊이 없이 이것저것 좋아하는 내 귀에도 가볍게 연주하는 음들이 “명징”하게 아름답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Franz Liszt와 Vladimir Horowitz에 잇는 세기마다 나온다는 천재소년은 어찌 연주하는 자태마저 그림 같을까? 파워풀한 터치로 머리칼이 잠시 하늘을 날 때 드러나는 앳되고 잘생긴 얼굴은 멋진 산토리홀과 잘 어울리도록 근사했다. 그리고 이어진 Mikhail Pletnev 지휘의 도쿄필의 Tchaikovsky: Manfred Symphony 연주는 웅장하고 공간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참 아름다운 밤이다.

Suntory Hall サントリーホール



꿈같이 행복했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아침 일찍 하고 싶었던 것이 참 많았었으나, 침대에서 늑장을 부리다 느지막이 샤워를 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엄마가 히츠마부시를 한번 더 드시고 싶어 하셔서 마루비루로 향한 점심식사가 유일한 일정으로 여행을 마무리한다. 인천공항에서 수화물을 찾고 나오니 벌써 8:00 PM, 공항리무진버스는 자정까지 매진이라 귀가가 더 늦어졌다. 다음날 밤샘작업이 있었고, 어느덧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훌쩍 넘어, 동네에서 흐드러진 벚꽃 구경을 한다. 4월이 되어서야 조금은 흐릿해진 여행의 기록을 남기는 밤이다.

남들보다 너무 가볍게 짠 일정이 아쉬웠을까? 너무 행복했던 시간이 다시 욕심을 난 것일까? 덜컥 6월 산토리홀 공연을 다시 예매했다. 이번엔 조성진 공연으로! 좋아하는 '헨델 프로젝트' 앨범 중에서 앙코르곡이 선정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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