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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플러그 Jan 15. 2024

게을러져도 괜찮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죄의식을 갖는 이유


영국에서의 일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시간을 잘못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죄의식이 들어."


평생을 그런 죄의식에 갇혀 지냈다는 말에 MJ가 가엾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혹은 뭔가를 만들지 않는 시간은 모두 허비되는 것으로만 여겼다.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다 그렇게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것들에서 손을 떼고 한눈을 팔고 있을 때면 늘 스물스물 죄책감이 기어올라왔다. 


'니 이런 식으로 시간 날려도 되나?!!'


그러면 다시 마음을 다잡고 뭐라도 하려고 든다. 이런 일상은 늘 반복되었다. 열심히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한눈팔고 정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열심 모드로 돌아간다. 그리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때면 늘 솟아나는 죄의식.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충격이었다. 나의 고백에 슬퍼하는 MJ의 눈이.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뭔가를 하지 않을 때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이다. 많은 학생들이 그러하듯 나도 방학 동안에는 정말 실컷 놀았다. 그러다 개학을 코 앞에 두고 미뤘던 방학 숙제를 하느라 늘 바빴다. 그때마다 후회했던 것 같다. '아, 미루지 말고 미리미리 할 걸. 미뤘더니 너무 힘드네.'


생각해 보면, "배 째!" 하고 방학 숙제 안했으면 될 일이다. "노느라 숙제 못했어요." 하면 선생님이 뭐 어쩌겠는가. (그때는 처벌이 가능했는데, 방학 숙제를 안 했다고 맞은 학생은 내 기억으로는 없다.) 선생님이 뭐 어쩌더라도 그냥 친구들 앞에서 망신 한 번 당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싫었던 것 같다. 가정에서와는 달리 학교에서는 착한 모범생으로 불리던 내 명성에 금이 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썩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해야 할 것들, 예를 들면 일기 쓰기, 탐구생활 등만이라도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내 모습을 엄청 신경 썼다.



죄의식도 이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 모습이 있다. 그리고 경험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한 톨도 아낌 없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는 사람'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성취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한눈팔지 않고 몰입하여 열심히 산다. 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게으름을 부리고, TV나 유튜브에만 진탕 빠져 살 때도 많다.


후자는 내가 나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내 모습을 몰랐으면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죄의식을 가졌던 이유는 후자의 나는 나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떻게든 빨리 처치해야 할 적으로 여겼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꼭꼭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토록 죄의식을 느꼈던 건 아닐까?



글을 쓰고 보니, 게으름 부리고 싶어하는 나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그 모습 또한 온전한 '나'이건만, '나'로서 대접해 주지도, 인정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적으로 상정하고 기필코 없애버리고 말겠다며 총구를 겨눴다.


올해는 게으름 부리고 싶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연습을 해야겠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더 이상은 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열심히 하는 나를 사랑하고 추켜세우고 토닥토닥해준 것처럼 게으름 부리고 싶은 나를 사랑하고 그동안 마음 고생 많았다며 쓰담쓰담해주려 한다. 네 덕분에 열심히 하는 내가 에너지 충전해서 열심히 살아낼 수 있었다고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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