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반해 법가의 평가는 보다 정치적이다. 상앙은 “삼왕의 의로움으로 천하 사람들을 사랑하고 오패가 법으로 제후들을 바로잡았던 것은 모두 천하의 이익을 사사로이 챙겨서가 아니라 천하 사람들을 위해서 천하를 다스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삼왕오패의 성공 원인이 천하의 이익이라는 공적 가치의 우선성에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좋은 정치’의 여부가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이기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 즉 부민(富民)에 달려 있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릇 이익은 다스려지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해악은 혼란한 것보다 큰 것이 없다”는 [관자]의 정치관 정립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군주의 덕은 신민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군주의 선의가 실천되어 책무이행이라는 당위성으로 전환한 것이다. 즉 삼대의 정치가 지닌 올바름이란, 사실 합리화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책무에 태만해서 결과적으로 신민의 이기성을 충족시키는데 실패한 통치자를 방벌한 결과라는 데 근거를 두게 된다. 그 결과 [관자]의 역사관은 옛날 성왕들이 성대한 이름과 큰 명예와 풍성한 공과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여 천하에 드날리고 후세에 잊히지 않는데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일찍이 듣지 못했던 반면 포악한 왕들이 나라를 잃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며 종묘를 전복시켜 천하에 멸망당한 것은 백성(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일찍이 듣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치를 실행하는 군주의 책무이행 첫 단계는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현실적으로 양생상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무릇 천하를 다투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 얻는 것을 먼저 다투고 큰 술수에 밝은 자는 사람을 얻고 작은 계략을 살피는 자는 사람을 잃기 때문에 천하의 백성을 얻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군주의 덕(德)에 의한 통치, 곧 예치 역시 법치에서 사용된 통치술로 신민의 덕(德)을 유도할 것을 요구하는 셈이다. 결국 민심을 얻는 방법은 백성을 이롭게 해주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백성을 이롭게 해주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방법론이 제시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신민의 교화가 가능해진다면 예의염치를 습득한 신민의 자발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