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
인도전법(因道全法)하는 존재
현실세계에서 도덕과 실력, 규범과 효능을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보여줄 수 있는 행위자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도대체 우리가 들었던 성왕(聖王)이란 누구이고, 또 이제 패(覇)라고 명명된 행위자는 성왕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관자]는 ‘패’의 개념정의를 위해서라도 ‘성왕’이라는 기존 관념의 개념정의와 함께 두 용어를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우선 성왕은 ‘성스런 왕’이라는 풀이처럼 도덕적 완성자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말’의 권위를 지닌 행위자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왕의 존재가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말’을 하는 ‘성인’의 출현이 먼저이다. 이 점에서 성인은 할 말을 고른 뒤 말하고 행할 일을 고른 뒤 시행한다. 구차하게 이익을 얻은 뒤에 해가 따르고 구차하게 즐거움을 얻고 나서 걱정할 일을 성인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중하고 올곧은 사람이라야 올바른 정치의 도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전제를 고려할 때, 도덕적 완성자인 성인(聖人)으로부터 자신의 책무이행 과정에서 신중함의 실천지를 갖고 정치적으로 재탄생한 성왕(聖王)의 출현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보니 [관자]의 성인과 패 개념이 바로 직전인 전국시대 말기 [순자]의 성인과 왕패 개념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성인이란 어떤 장점을 지닌 행위자일까? 세상사의 옳고 그름은 반드시 섞여서 동시에 나온다고 한다. 이로 인해 어떤 일이 옳다고 믿는 것은 어떤 그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그릇된 것임을 알고 심사숙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널리 듣고 많이 보아 사물의 원리에 대한 인식을 쌓아서 새로운 사태의 출현에 대비하는 자이며 새로운 사태가 출현하면 사물의 원리에 비추어서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중함과 상도(常道)에 근거한 표준을 제시하는 자이다. 이렇게 정의된 [관자]의 성인은 ‘과거’가 아닌 ‘새로운 사태’에 조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인 셈이다. ‘사물의 원리’를 통찰한다는 것은 역사의 법칙성과 연속성을 조망함으로써 언제나 직면하는 ‘새로운 사태’에 선택의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관자]의 성인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치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시대적 추세를 안다”는 상앙의 성인 개념과 “성인은 그 요체를 쥐고 있으며 그 원칙을 단단히 쥐고 조용하게 기다려 스스로 명분을 밝히게 하며 저절로 일을 처리하도록 시킨다”는 한비자의 전망처럼 “때를 명찰하여 때를 어기지 않는” 인도전법(因道全法)하는 행위자라는 법가적 전통을 계승하는 듯이 보인다. 즉 요·순 같은 도덕적 완성자에 의한 이상적 통치를 추구한 법고적이고 윤리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법제에 따라 통치하는 평균적 인간으로서 군주에 의한 법치를 추구한 변고적이고 발전적인 역사관의 논리적 귀결일 수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법가의 인식이 성인을 통치의 요령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규정한 반면, “성인이란 우리들의 마음에 동일한 바를 먼저 체득한 자일 뿐”이라는 [맹자]의 단언에서 보이듯이 유가적 성인관은 보편적 원칙을 먼저 체득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면서도 맹자 역시 컴퍼스와 곡척(規矩)이 네모 모양과 둥근 모양의 표준이듯이 성인은 인륜의 표준이라고 전제하며, “사람의 형체와 용모는 타고난 것인데 오직 성인이라야 타고난 형체와 용모를 그대로 실현시켜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인은 백세의 스승이라는 표준의 의미로 제시한다. 즉 맹자에게 성인은 도덕본성을 도덕행위의 실천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자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역할 모델인 셈이다. 따라서 유가와 법가 모두 현실인간에게 성인으로의 실현가능성을 언제나 개방해 놓고 있다.
문제는 모든 현실인간이 가진 이기성, 즉 무릇 사람의 정리라는 것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즐거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만나면 근심하는 법이니 이처럼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 똑같이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한계점이다. 그렇게 보면 군주의 덕(德)이 예치의 실현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대체 성인은 어떤 동기를 제공하고 역할이 무엇일까? 여기에서 [관자]의 답변은“성인은 덕을 정밀히 하고 중도를 세워 정도가 나오게 하고 정도를 밝혀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성인을 역사관으로부터 도출된 표준적 행위자로 설정한 셈이다. 그렇게 해야만 역사의 변화과정에 조응하는 정치현실로부터 표준적 행위자인 성왕의 출현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자신의 덕을 실천하는 성왕의 출현은 명분이 바로 선 자발적이고 규범적인 질서의 완성을 반증한다는 예치론의 논리에 부합한다. 그 결과 도덕적 완성자로서 성인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성왕으로 전환될 수 있다.
만약 상기한 추론이 말이 된다면, 성왕(聖王) 또는 밝은 군주(明主/明君)는 성인의 표준에 정확히 부합하는 통치자이다. 그래서 “도란 진실로 인간의 본성이다. 도가 아닌 것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성왕과 밝은 군주는 이를 잘 알아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자]는 밝은 군주가 천하를 다스릴 때, 반드시 성인을 등용한 뒤에야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왜냐하면 성왕을 도덕적 완성에 따라 자신의 선(善)을 실현할 수 있는 통치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적 완성과 기존의 표준을 부합시켜 자신의 선을 실현하는 통치자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성왕의 통치’로 평가받기 위한 관건은 군주 자신이 통치행위를 성인의 표준에 얼마나 충실히 적용했는지 여부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밝은 군주는 일을 할 때 성인의 지혜에 맡기고 뭇사람의 힘을 쓸 뿐 스스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일을 이루고 복을 얻는다고 하고, 밝은 군주는 성인과 함께 일을 꾸미기에 정확하며 성인과 함께 일을 거행하기 때문에 그 일이 성공한다고 하며, 밝은 군주는 자신의 지혜를 쓰지 않고 성인의 지혜에 맡기기 때문에 성인의 지혜로 생각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외형상 어느 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밝은 군주는 정신과 활동 모두에서 성인의 표준에 의탁함으로써 ‘지선(至善)의 정치’를 실현한 성왕의 단서를 보여주는 행위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