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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이십팔호 Sep 28. 2021

밝은 군주의 아홉 가지 수칙(九守)

정말 성왕의 도가 현실의 군주에게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현실 속에 군주가 어떻게 해야 성왕의 도라는 표준에 가까운 실재 통치자가 될 수 있을까? [관자]는 이런 현실의 군주를 ‘밝은 군주’라고 명명하고, 아홉 가지 수칙(九守)을 준수하는 순간 성왕의 도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즉 9가지의 표준을 준수하여 진짜 성왕의 도에 이른 ‘밝은 군주’는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지 못함이 없고 세상 사람의 귀로 들으면 듣지 못함이 없으며 세상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알지 못함이 없는 자이다. 그 이유로 군주의 덕행과 위엄은 남보다 현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가 바로) 군주이기에 그를 따르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밝은 군주는 경거망동하지도 않지만 할 필요도 없이 신중한 태도만을 취하는 것으로도 좋은 정치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한 자이다. 이렇게 신중함은 군주를 산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편당을 만들어 군주의 눈을 가려서 볼 수 없게 만드는 신하들 때문에라도, 주밀해야 하는 군주의 덕목에 부합하는 태도이다. 


반면 현실 속의 군주가 밝은 군주의 요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 조정에서는 서로 군주의 눈치나 살피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자신의 명성을 사려고 하며, 군주를 이용하면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따져서 군주가 듣고 믿게 하여 자기들 뜻대로 처리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군주는 자세히 살피지 않고 남의 의견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살피지 않고 타인의 의견에 찬동해서는 안 되며, 가볍게 찬동하면 원칙을 상실하고 가볍게 거절하면 언로가 막힌다는 판단 하에, 두루 의견을 청취하고 홀로 결단하는데 아래 신하들은 상급 관리들에게 스스럼없이 자기 속내를 낱낱이 밝힐 수 있게 하고 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고귀한 지위의 관리들이 귀담아 듣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밝은 군주는 경청(敬聽)과 독단(獨斷)의 통치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관자]에서 그 사례로 제환공이 성왕을 본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자, 관중이 제시한 책실지의(嘖室之議)의 제도를 거론한다. ‘책실지의’, 곧 ‘떠드는 방에서의 의론’이란 사람들이 군주의 잘못한 바를 비난함이 있으면 정사라고 불리는 직간신의 회의에 이것을 의제로 채택하여 일을 맡아 처리하는 관리가 이 문제를 회의에 붙여 백성을 깨우쳐 잊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책’(嘖)은 ‘말’을 통해 진행되는 양상이고, ‘말’을 통해 무엇인가 전달됨으로써 ‘각성’의 결과를 가져오는 방법론인 셈이다. 따라서 각성한 군주=밝은 군주는 첫째 눈으로 멀리 봐야 하고 둘째 귀로 잘 들어야 하고 셋째 밝게 살피는 제도를 세워 천리 밖의 은미한 일까지 밝게 알아 간사함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밝은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면 백성을 안정시켜 흔들리지 않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고달프게 하지 않는 ‘좋은 정치’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를 항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밝은 군주는 명칭에 의거하여 실제를 살피고 실제에 비추어 명칭을 확정한다. 즉 정명을 이루고, 이렇듯 명칭과 실제는 서로 의존하고 서로 설명하니 서로 부합하면 다스려지고 부합하면 어지러워진다는 명실상부함을 구현함으로써 질서의 실체를 드러내는데 성공한다.


다른 한편 현실 속 군주가 해서는 안 될 사항들도 주의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군주의 책무태만이다. 그것은 밝은 군주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각성’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민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하고 그 결과 민심을 획득하는 것이 좋은 정치임을 고려하면, 군주가 생명 보전하기를 좋아하면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살고 또 양생만 할 것이고, 그러면 방종하고 망령되이 행동하고 남녀의 구별이 없어져 금수의 상태로 돌아가며 예의염치가 서지 않아 군주가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이다! 신민의 이기성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도덕적 완성과 덕의 실천을 책무로 규정한 밝은 군주와 달리 군주 스스로 자신의 이기성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 애초부터 질서의 회복과 유지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흡사 한 나라의 왕이 어떻게 하면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그 아래에 있는 대부는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선비와 서민들은 어떻게 하면 내 한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고 군주로부터 출발한 미성숙과 미각성의 악순환을 지적한 [맹자]의 논리를 보는 듯하다. 따라서 군주가 끝없는 욕심을 끝없이 채우려하면 위아래가 서로 질시할 수밖에 없어 신하가 군주를 죽이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경우가 생길 것이라고 명실의 전도를 경고한다. 이러한 [관자]의 전망은 군주-신민 간 시혜와 보상이라는 공적 영역의 호혜성이 그들 각자의 사적 영역에 의해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밝은 군주의 정반대편 지경에 이른 군주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지러운 군주’(亂主)라고 명명된다. 왜? 이런 군주는 의를 잃고 호령은 민심에 거스르고 처형함이 그 죄에 마땅치 않고 상을 내림이 그 공적에 마땅치 않은 통치자이기에 희생과 규벽을 사용하여 귀신에게 기도하더라도 귀신이 돕지 않고 천지가 돌보지 않으며 일에 재앙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어지러운 군주’이다. 귀신조차 돕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애처롭고 가소로운 모습으로 비치겠는가? 만약 군주가 사사로운 논의를 스스로 귀하게 여기면 (각성한) 백성은 물러나 산속에 은거하여 세상일을 비난하고, 뭇 신하들이 붕당을 만들어 선을 가리고 악을 드러내어 나랏일의 진위가 군주에게 알려지지 않으며 군주가 (주변의) 아첨하는 말과 허물을 은폐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정치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지러운 군주’는 신하의 힘이 커져서 나라의 상황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고 유리한 정보든 불리한 정보든 접할 수 없으며 점점 미혹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 꽉 막힌 상태가 돼버린다. 그러므로 무능한 사람들이 조정에서 군주에게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생각이 삐뚤어진 사람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군주의 보고 듣는 것을 가리고 막으며 충신이 직접 나아가 간언하려고해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신하에게 능멸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어지러운 군주는 ‘앞뒤 꽉 막혀 능멸당하는’ 색침(塞侵)의 군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현실 군주의 통치술은 현실 인간의 이기성을 합리성의 단서로 삼아 규범화하는 선택이어야 한다. 


특히 군주가 부르면 모이고 파견하면 나가며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군주의 생각을 따르게 하는 것이 교화의 기대하는 바라는 일반명제를 상정할 경우, 밝은 군주의 통치는 자신의 책무이행에 따라 신민의 자발성을 기대할 수 있는 기제이다. 그 결과 예치의 최종단계는 군주가 그 위엄을 잃지 않고 신하가 그 직분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 서로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데 이르므로 윗사람이 덕에 힘쓰고 아랫사람이 직분을 지켜서 예의가 위에서 형성되고 선함이 아래로 백성에게 흐르면 백성은 위로 군주에게 귀부하여 친해지고 아랫사람은 농사에 힘을 다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명에 기초한 질서로 군주-신민 간 관계의 쌍무성이 규범의 단계에 진입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예치론은 “성인이 정치를 할 때 궁궐을 검소하게 하고 수레를 검소하게 치장하여 나라의 창고를 채우면 나라가 반드시 부유해지고 군주의 지위가 반드시 존귀해진다”는 결론, 즉 성인=밝은 군주=부민=부국=존군(尊君)이라는 등식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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