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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Jun 23. 2022

비염인 탓에 일상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그러나 전부터 유독 풀냄새만큼은 면밀하게 맡을 수 있었다. 자다 깬 것처럼 기억이 시작되는 여섯 살 무렵부터 그 냄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맡아졌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주어진 숙명처럼 여겼다. 인위적인 것과는 영 다르니까. 나는 자연히 초록색, 녹음, 우거진 숲, 텃밭에 심긴 작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이제는 바다마저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 정도면 자연을 편애하도록 설계된 건가 싶을 정도로 나는 자연과 운명을 결부시키는 버릇이 생겼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들어오게 된 걸 필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봄이 되면 공기 중에 녹은 꽃 향을 맡고, 여름에는 녹음진 동네를 걷고, 가을에는 농익어 떨어진 열매를 줍고, 겨울에는 온통 하얘져서 세상이 다시 시작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곳. 나는 그런 읍내 카페 한구석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다. 저 비는 다른 생명 속으로 가닿아 움트겠지. 동네를 촉촉하게 적셔놓고는 일면식도 없는 몇 사람을 별안간에 생각에 잠기게 만들겠지. 날씨에는 돌이켜보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난 무언가에 불현듯 잠기게 만들어 성찰하게도 만들고 이해하지 못했던 통념을 이해하게 만드는 등 모종의 일을 잘도 꾸민다. 나는 그런 자연을 좋아하고, 비 맞기를 주저하지 않던 너를 회상한다. 비도 세상의 일부라 맞고 있으면 세상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기분이 된다던 너의 문장을 나는 두어 번 발음했다. 너와 있었던 어느 장마철의 하루를 떠올리고는 슬며시 웃었다. 우리 왜 우산 하나만 쓰는 거야, 다 젖었네, 하면서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던 너의 모습을 나는 주저 없이 그릴 수 있다.      


너 그때 남의 집 담벼락에 붙은 앵두를 곧잘 따먹었지. 나는 그걸 보고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활짝 폈다. 동네 산책로를 발견했다며 같이 걸었던 것도 잊지 않았다. 삼십 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고 호언한 것과는 다르게 한 시간 이십 분을 걸었지. 헉헉거리면서 흘린 땀방울을 소중하게 닦아줄 정도로 우린 서로를 예뻐했었다. 서로의 땀을 과실처럼 여겼으니까. 좀 힘겨워도 같이 이겨내자고 약속했잖아. 너와 했던 것처럼 힘든 내색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아마 그 시절에만 나눌 수 있었던 말인 것도 같다. 어떤 관념에도 발목 잡히지 않았던 것 같고. 어느 순간에 그때의 정신을 가질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는데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고 자라다 보면 응당 도달하게 되는 지점에 도착했다고 느꼈다. 앞에는 겪지 못한 또 다른 지점들이 많겠지. 다만, 나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굳이 등을 돌리고 우리가 같이 걸었던 길을, 돌연 생기는 바람에 우리가 갈라져야 했던 교차로를 바라보고 싶어 진다. 특정 시점에 응당 생기는 것처럼 자연히 돋아난 갈림길이었다.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위화감이 없었다.      


이 동네 이름은 백석읍. 산성에 흰 돌이 있어서 백석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백석읍 관할 법정리 중에는 가래나무가 많아서 가래비, 홍동리와 천죽리를 통합하면서 각 이름을 딴 홍죽리, 같은 이유로 기곡리와 중산리가 합쳐진 기산리가 있다. 지명에 기존의 이름이 따라붙듯 내 기억에 네가 따라붙는 것도 당연한 순리일 것이다. 앞으로 걸으면서도 별안간에 등을 돌려 뒤를 쳐다보고, 네 이름을 더듬어보겠지. 비염이 있지만 풀 향을 선명하게 맡을 수 있는 것처럼. 풀 향을 맡을 때마다 너를 떠올리는 것을 보면 너는 자연, 내가 숙명이라고 믿는 자연을 닮았던 것 같다. 그것이 필연이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제 그리운 것을 그립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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