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 책 크기만 한 쪽창으로 빗소리가 들이친다.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초여름의 소나기를 이불을 덮은 채 듣는다. 가만히. 그러고는 불현듯 상기되는 것들을 상기한다.
돌이켜보면 각별한 것을 잃은 계절은 매번 겨울이었다. 그탓에 무슨 연유에서든 첫눈, 눈으로 덮인 골목, 두 쌍의 발자국, 크리스마스, 아무튼 겨울을 대표할만한 낱말들이 떠오르는 날이면 눈꼬리가 자꾸만 뭍으로 쳐졌다. 아래로, 더 아래로. 서글픈 눈빛.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빛. 어떤 얼굴을 애써 기억해 내려는 눈빛이 으레 그래야만 한다는 듯 지어지는 것이었다.
그 뒤로 자연히 따라붙는 것들도 있었다. 누군가 애용했던 향수내음, 춥다고 챙겼던 장갑 대신 맞잡았던 손의 온기 같은 것들.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기어코 그렇게 될 거라며 주고받았던 모종의 미래들. 그들이 머리맡에 근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을 양손으로 콱 붙잡듯 부러 곱씹었다. 그래야만 그동안 해소되지 못했던 감정들이 조금이라도 공감을 얻고 다시 쌓일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문제는 서두부터 두서없이 꺼낸 이 내밀한 이야기로는 겨울도 아닌 초여름에, 함박눈이 아닌 소나기가 펑펑 내린 날에 내게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현듯 당신이 기록된 글을 찾고, 당신의 얼굴을 눈앞으로 꺼내고, 당신의 냄새를 맡아보려는 시도를 왜 하고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한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는다. 온기를 가늠한다. 두 귀를 열고 하루 여분의 소리들을 밀고 들어오는 빗소리를 듣는다. 감긴 시야로 잠깐씩 비치는 실지렁이를 둘둘 뭉쳐 얼굴을 빚는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형의 덩어리로만 완성될 뿐 당신이라고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
다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름, 그나마 기억하는 두 음절을 더 확실히 기억하기. 그 이름과 맺은 약속을 끝까지 이행하기. 적어도 노력하기. 마침내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어느 초여름에, 소나기가 눈처럼 펑펑 내린 날에 나는 뭍으로 향한 눈빛으로 새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