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의 익숙한 공식과 새로운 공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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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주변에서는 십중팔구 방탄소년단(BTS)의 인기요인을 묻는다. 내 답변도 정해져 있다. 일단 훌륭한 음악과 퍼포먼스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하에, 미국에서 찍은 리얼리티로 북미 팬들과의 친밀도를 높였다거나 소년 같은 매력이 신선했다거나 SNS를 통한 실시간 소통 등이다. 그런데 사실 설명하기 어려운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말하자면 ‘세계관’을 잘 구축했다는 것이다.
‘화양연화 3부작’은 성장통을 겪은 소년들의 처연한 세계를 구현했다. 이 세계관은 일관성 있는 앨범 컨셉과 음악(가사), 뮤직비디오, 방탄소년단의 일관된 메시지로 완성되었다. 실재하는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의 세계이니 현실이면서도, 방탄소년단이 만든 음악 속의 세계이니만큼 환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오가면서 두 세계에 매혹된 사람들을 모두 자신들의 팬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달의소녀(LOONA)는 바로 이 세계관의 환상성 측면을 극대화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방탄소년단의 접근법보다 더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이 청소년의 성장소설에 가깝다면, 이달의소녀의 세계관은 각 멤버가 고유의 속성을 가진 일본 애니메이션 쪽에 더 가깝다.
이는 데뷔 전부터 기획해 왔던 정병기 프로듀서 개인의 창작물이기도 하다. 아이돌 그룹의 성공 여부가 절반 이상 기획력에 기댄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기 세계가 굳건한 프로듀서는 이달의소녀에게 나름의 호재였을 것이다. 덕분에 이달의소녀는 국내 성공 여부에 비해 유의미한 규모의 해외 팬덤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번 컴백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정병기 프로듀서가 이번 컴백부터 이달의소녀 프로젝트에서 빠진 것이다(!) 자, 위기에 빠진 이달의소녀. 그러면 신곡 <So What>은 어떻게 된 걸까?
정병기가 빠지자, SM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이수만이 왔다. 이수만이 이달의소녀 신곡을 프로듀싱했다는 뉴스가 뜬 날 SNS는 그야말로 대경실색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도 모르지만, 뭐, 그래… 이렇게 됐으니까… 이수만은 이달의소녀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수만이 이달의소녀에게서 끌어올린 것은 여성 아이돌 그룹에게서 찾기 힘든 강렬한 퍼포먼스다. 이달의소녀가 그간 선보인 <Hi High>의 청량한 컨셉이나 <Butterfly>의 몽환적인 컨셉에서는 퍼포먼스가 주목받기 어렵다. 그에 반해 소위 ‘걸크러시’ 컨셉은 퍼포먼스 능력을 전면적으로 선보이기 적합하다. 하지만 걸그룹으로서 파워풀한 컨셉은 쉽사리 성공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이수만은 그런 의미에서 적임자다. SM에서 일련의 아이돌 그룹을 지휘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달의소녀에게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풀어낸 것이 이번 신곡 <So What>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병기 프로듀서가 쌓아 올린 세계관 기획이 흩어졌다. 기존의 이달의소녀 팬들은 충분히 궁금증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드아이서클(이달의소녀의 두 번째 유닛)’은 어디 갔지? 멤버들의 상징 메타포는 어디 갔지?
말하자면 이수만이 보여준 것은 익숙한 케이팝의 성공 공식이다. 타율이 높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정병기가 보여준 것은 기존에 없던 공식이다. 성공은 보장되지 않지만 차별성은 확실하다.
이수만의 이달의소녀는 절반의 성공, 절반의 보류다. 지금 여자아이돌 팬덤 쪽에서는 꽤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달의소녀를 다른 그룹과 차별화시키던 지점은 놓쳤다는 점에서 보류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음 앨범에는 이 부분을 짚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케이팝 팬덤은 수준 높은 퍼포먼스와 잘 짜여진 세계관을 합쳤을 때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 방탄소년단을 목격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달의소녀가 넥스트 제네레이션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준비물은 갖춰졌다. 다음 기획자의 상상력을 기대한다.
PS. 이 글이 올라간 후 이달의소녀는 3월 12일 방영된 엠카운트다운에서 첫 1위를 차지했다. 이수만의 방식이 옳았다는 게 일차적으로 증명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