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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30. 2020

확실한 행복도 흔들린다

육아는 가치 있다 가치 있다 가치 있다...

연년생을 돌보며 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기예(技藝)에 가까운 일이다. 지금 나는 우리집 나무 식탁에 토스트한 빵에 커피를 곁들여 먹으며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을 읽는 중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자면, 다리로는 짐볼을 타며 슬링으로 신생아를 안고. 식사 뒤에 아기 얼굴에서 빵가루를 털어야 하는 일이 없도록 빵보다 3배는 큰 접시를 목에 받친 채로. 그야말로 기술과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주접스러운 형상이지만 그나마도 첫째가 아직 자고 있어 가능한 일이니 오늘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좀 읽다가 커다란 빵을 자르지도 않고 냉동실에 넣어놓은 남편에게 훈계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반자동적으로 들어간 sns에서 며칠 전 대학 동기들의 청첩장 모임 사진을 보고 말았다. 신생아를 키운다는 핑계이자 정당한 이유로 이번 모임은 피해 자존감을 지켜냈지만, 다음 달 10년 친구의 결혼식은 피할 수가 없다. 변호사, 의사,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 사이에서 전업주부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자존감을 도둑맞기 딱 좋은 일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임신하고 찐 살을 뺄 수도 없을 텐데, 미혼인 친구들은 왜 이렇게 반짝반짝 예쁘기만 한지... 수유복이 유니폼인데 그날 하루 입자고 원피스를 사야 하나...


상념에 빠질 틈도 없이 방문이 달칵하고 열린다. 첫째가 깬 소리다. 먹던 빵을 입으로 욱여넣고, 첫째를 맞이한다. 이제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오실 때까지 1시간은 내가 버텨야 한다. 신생아를 안은 채로 그 위에 12kg 되는 첫째를 안아 식탁의자에 앉히는 게 매일의 일상이니 산후조리가 될 턱이 없다.


날이 좋은 요즘의 아침 일과는 첫째와 산책이다. 기저귀를 갈고, 양말부터 겉옷까지 입히는데 한 세월이 지나고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겠다는 아이와 씨름하다가 드디어 건물 밖으로 나가는 데까지 한 세월이다. 아이와 걸어본 자는 알 것이다.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내가 원하는 곳까지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그야말로 자유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나, 엄마이자 비자유인에게는 집부터 놀이터까지 가는데도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이란 없으니, 첫째에 손에 이끌려 나뭇가지도 주웠다가 개미도 봤다가 놀이터까지 가는데도 다시 한 세월이 걸린다. 다행히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계시는 기간이라 한 명만 모시고 산책할 수 있지만, 이제 몇 주 뒤면 둘째까지 품에 안고 산책해야 한다. 괜히 상상하지 말자 싶어 미끄럼틀이나 신나게 타본다.


점심을 먹고 먹이고, 수유를 하고 첫째 낮잠시간이다. 둘째 출산 전에는  첫째를 재운 뒤에 기를 쓰고 일어나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드라마를 보든 하다못해 핸드폰만 하더라도 내 시간을 가졌지만 요즘은 밤중 수유로 인해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정신없이 잠에 휩쓸려버린다. 가뜩이나 해도 짧아져서 낮잠 자고 일어나면 바깥은 어둑어둑, 하루가 거의 끝난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도 오늘 나의 이 우울감은 숨겨지지 않는다. 커리어 빵빵한 친구들 이야기를 꺼내면 자기 잘못도 아니면서 미안해지는 얼굴이 보고싶지 않다. (남탓을 하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가끔 이렇게 양심적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서글픈 '슬픈 젖꼭지 증후군'을 대신 내밀었다. 모유수유하면 도파민이 줄어든다는 리현상인데, 내 이야기를 듣더니 신랑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설거지를 하고 집 정리를 하고 두 아이를 씻기고 재운 뒤에 침대에 뻗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보다 자주 웃는 사람이 행복한 거랬다. 오늘의 나도 평소처럼 자주 웃었다. 첫째는 한창 말을 배울 때라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엄마 가치!(엄마 같이!)" "엄마양(엄마랑)" 등으로 나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하고, 둘째는 첫째보다도 뛰어난 신생아 미모로 나를 홀린다. 우리 남편은 밤중 수유 때에 일어나 기저귀를 갈고 나를 깨우는 유니콘같은 사람이, 우리는 힘든 육아의 틈새에도 서로 장난을 치며 깔깔댄다.


침대 위 내 뒤편에서는 아기침대 위 둘째가 쪽쪽이를 빠는 쪽쪽 소리가, 내 품에서는 첫째가 손가락을 빠는 쪽쪽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온다. 그고도 부족해 손을 내미니 남편의 손이 내 손위에 따뜻하게 포개진다.


자주 웃는 나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육아는 '가치 있다 가치 있다 가치 있다' 되뇌어야 겨우 가치 있는 일이서, 생생하게 손으로 만져지는 행복과 귀로 들려오는 행복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형체도 없는 인스타그램 속 동기들의 사진 한 장에 의 확실한 행복은 흔들린다. 

출처 : @karacandr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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