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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Feb 04. 2021

육아로 욜로!

연정훈이 쏘아올린 작은 공

어느 오후, 첫째 아이를 낮잠 재우고 나와, 눕혀두었던 4개월짜리 둘째를 얼른 안고 리모컨을 잡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첫째의 낮잠시간, 무엇을 볼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토막토막 끊어보고 있는 1박 2일을 부리나케 틀었다. 허리에는 힙시트를 차고 발로는 짐볼을 타고 있었다. 티비를 본다고 둘째를 위한 둥가둥가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소중한 여유를 즐기기 위해 티비에 집중하는데, 연정훈이 육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다 보면 잠깐의 여유가 더 소중하게 느껴져.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 중요한 순간들로 바뀌고 매 순간에 더 집중하게 돼. 그래서 나는 너희가 꼭 육아를 해봤으면 좋겠어.”


나는 짐볼을 구르기 위해 통통거리던 발까지 멈추고 온 신경을 집중해 들었다. 여느 예능에서처럼 결혼과 육아를 고행의 시작으로 비유하며 최대한 늦게 해라, 후회된다며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렇다고 생명의 신비나 모성의 아름다움, 심지어 국가의 출산율까지 이야기하며 출산, 육아를 장한 일이라던가 이타적인 일 또는 당연한 일로 보는 것과도 달랐다.


그의 말이 더 와 닿았던 것은 평소 프로그램에서 그가 보여준 열정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열정훈'정도로 그는 매사 열심이었고 매 순간을 즐기곤 했다. 게임마다 남다른 승부욕을 활활 불태우면서도, 결국 벌칙으로 야외취침이 주어지면 그마저도 그는 추억이라며 허허 웃고는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자막에는 그의 말이 마치 빼어난 외모로 유명한 배우 한가인의 남편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인 것처럼 정리되었지만, 같은 육아인으로써 보기에 그 말은 모든 육아인에게 적용되는 참말 중에 참말이었다. 우리 남편의 외모는 한가인만큼 아름답지 않지만, 나도 아기를 키우기 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으로 삶을 음미한다. 지금 이 순간도 처녀 적 같으면 소파 위에 머리를 괴고 삐딱하게 누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볼 거 없다는 소리를 내뱉으며 넘겨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육아인에게는 티비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도, 아니 토막내서라도 볼 수 있는 20분, 30분이 주어지는 것도 귀하다. 아이가 낮잠에서 깨서 빼꼼히 등장하지는 않을지 방문을 주시하며 보는 예능프로그램의 모든 순간은 하나하나가 다 빵빵 터진다.


친정이나 시댁 찬스로 남편과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들을 했다.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공원을 산책하기,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기, 침대에 누워서 영화보기 같은 소소한 일들도 버킷리스트에 오르고 나니 특별한 일들이 되었다. 20대 때는 밥먹듯이 카페에 갔지만, 지금은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많아야 일주일에 한 번이다. 그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나는 들을 음악과 읽을 책도 가장 좋은 것으로 미리 골라놓는다.  


육아로 인해 삶이 더 소중해지는 효과는 심지어 원래 좋아하지 않았던 일에도 적용된다. 내 경우에는 시어머니가 권하신 수지침 수업이었다. 시어머니는 수지침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셔서 형님과 나의 아이들까지 봐주시며 우리를 수지침 수업에 보내셨는데, 그 시간도 그리 즐거웠다. 그것이 노인복지관에서, 50대에서 70대까지의 어머님들이자 시어머님의 친구들 속에서 듣는 수업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한약도 한번 안 먹어봤고, 침도 그 수업에서 처음 맞아봤을 정도로 한의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때는 그저 무언가를 앉아서 배운다는 게, 한 손에 젖병이나 쪽쪽이가 아니라 펜을 들고 무언가를 쓴다는 게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들과 떨어져 시간을 보내고 오면 아이들과의 시간은 그대로 더 소중해졌다. 카르페디엠의 달인들인 아이들은 함께 있으면 있는 대로, 떨어져 있으면 떨어진 대로 내가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비혼과 비출산이 개인의 선택을 넘어 어떠한 트렌드가 되고 있는 요즘. 많은 이들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망가질 것을 두려워한다. 내 삶도 당연히 망가졌다. 하지만 동시에 한 차원 올라갔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이 쓰여있는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우리 아이들.'이라는 구절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참말이다. YOLO(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며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처럼, 나도 YOLO라서 아이를 낳았고 기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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