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밤 Sep 07. 2020

바람이 불어오는 곳

큰일이다. 둘째가 안 나온다.


진짜 예정일은 아직 일주일이 남았지만, 내 마음속 예정일이 진즉에 지났다. 요즘 기준으로 일찍 엄마가 된 탓에, 내 친구들은 둘째는 고사하고 결혼도 아직인 미혼여성들이 대부분이라 가까운 둘째 출산 유경험자는 다섯 살 연상의 형님뿐이다. 형님이 둘째를 예정일 보름 전에 낳았으니 내 마음속 예정일은 출산예정일 보름 전이었다. 마지막 검진 때 이제는 언제 낳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까지 들었더니 자꾸만 아직 뱃속에 있는 오돌이를 재촉하게 된다.


변비에 걸린 기분이다. 애를 변에 비유하니 좀 그렇지만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고 있는 심리적인 이 느낌. 어련히 나오긴 나오겠지만 마음이 급한 이 느낌! '변비'의 '비'자는 '신비롭다'의 '비'와 같은 숨길 비라고 하니 변비라는 단어를 떠올린 찝찝함이 좀 가신다.


변을 밀어내는 법과 아기를 밀어내는 방법 또한 비슷하다. '운동'이다.

 마침 서를 넘기니 저녁에는 선선해졌고, 태풍까지 지나고 나니 낮에도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대중교통이 잘 안 돼있고, 집값은 싼 우리 동네지만(심지어 우리는 전세살이 중) 큰 장점이 있다면 도심에서 벗어난 곳이라 녹지가 많다. 요즘은 남편에게 또는 멀리서 원정 와주는 친정엄마에게 첫째를 부탁하고 틈나는 때마다 걷는 중이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서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 복용해줘야 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다는 글을 읽었다. 나의 경우에는 '음악 들으며 혼자 걷기'가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혼자'인데, 두 돌이 안 된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전업주부에게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퇴근하고 나면 거의 바로 육아빠라는 직업으로 재출근을 하는 바람직한 남편이지만, 막상 남편이 아이를 봐준다고 하면 무용한 일인 '걷기'는 잘 선택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도 나름 하루 종일 직장에 있다 왔는데 매일같이 첫째를 맡겨놓고 외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나에게 남편과의 시간도 소중하다 보니 혼자 외출하는 기회를 생각만큼 자주 잡지 않았기 때문도 있다. 하지만 출산을 앞두고 운동이 필요한 지금만큼 걷기가 유용하고 필요한 순간이 없으니, 덕분에 나의 소중한 경험을 복용한다. 


 덥던 춥던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가을은 정말 걷기에 최고의 계절이다. 봄에도 걷는 것은 재밌긴 하다. 보이지 않던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것, 흙빛 땅이 점점 더 연둣빛이 되어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봄 걷기만이 주는 행복이다. 하지만 가을은 뭐랄까. 어나더 레벨이다. 아무것도 안 보여도 좋아랄까. 여름 간 더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걸을 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새삼 생경해진 시원한 공기로 가을 걷기는 시각으로 걷는 봄 걷기를 촉각으로 압승해버린다.


 선선한 바람에 맞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듣기로 했다. 7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교포 오빠인 우리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김광석'이다. 그중에서도 온 국민이 전주만 들어도 아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그의 페이보릿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첫째를 임신한 기간 동안 태교 삼아 우리 둘은 함께 기타를 연주하며 그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웬만큼 치는 남편과 아는 것은 코드 6개지만 기타를 즐기는 나. 신혼집을 꾸미며 각자의 기타 2개와 자그마한 우쿨렐레를 벽에 걸었다. (누가 보면 음악가 집인줄)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허니문으로 걷던 순례길에서 갑작스럽게 발견한 임신이었다. 임용고시생이라는 나의 신분과, 단기간이지만 무직이었던 남편, 우리 둘의 젊은 나이.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두 줄이 그어져 있던 임신테스트기는 그야말로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그렇지만 행복이었다. 친구들이 커리어를 착실히 쌓아가는 소리나, 함께 임용고시를 준비했던 사람들의 합격소식이 종종 들려왔던 순간들은 엄마됨을 종종 후회하게도 만들었지만,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의 출현은 우주가 전복하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나도 참 많이 컸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기도 절로 나왔으면 좋겠건만, 아무래도 이 시국에 '자궁 밖은 위험해'라는 생각이 드는가 보다.  


한참 걷다 돌아오니, 우리 엄마 품에 있던 나의 행복이 쪼르르 달려 나와 나를 반긴다. 손 씻을 틈도 아까우니 어서 나랑 놀아달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육아로 욜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