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글을 쓰다 보면 자주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바닥 아래 구멍이 느껴지는 논리 구조, 황무지의 먼지바람처럼 한없이 가볍게만 부유하는 문장들, 낭떠러지처럼 뚝 끊어지는 맥락, 그리고 마무리되는 텅 빈 글. 고민만 이어나가다가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마지못해 발행 버튼을 누르고야 말지만, 늘 아쉬움은 남고, 그 아쉬움은 또 다른 부끄러움이 된다. 그래서 글을 자주 쓰지 못하는 걸까?
쓰지 않는다고 해서 글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건 아니었다. 최근엔 철학 책을 많이 읽는다. 대학 시절 철학과도 아니었고, 지금은 공부를 이어나갈 강제성이라고는 하나도 느끼지 않는 직장인이지만 굳이 철학 책을 탐독한다. 생각은 스스로 경험한 것에 갇혀 고이기 마련이기에 주위 환기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나와는 다른 깊이감으로, 다른 방향으로 하는 생각을 마주하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은 철학자의 단단한 논리화 과정이다. 자신의 사유가 허공의 메아리로 스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물 한 방울 새지 않도록 빈틈을 메우는 촘촘한 노력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독자인 나에게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과정은, 독자인 나의 노력에 선행해 논리를 한 줄 한 줄 쌓는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단단한 논리를 따라가며 스스로를 사유하게 만드는 것은 비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퇴근한 나에겐 무리일 때가 왕왕 있다. 그럴 때엔 에세이를 읽는다.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필기를 하며 읽지 않아도, 에세이의 부드러운 흐름은 나의 생각에 타인의 사유를 겹쳐볼 수 있게 이끈다. 노랗고 흐린 조명 아래 침대에 누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두뇌 활동을 시켜주는 것이다. 하지만, 에세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를 물리적으로 움직여 머릿속의 활동에 대해 무엇이라도 기록하게 만들고야 만다. 에세이란, 작가의 특별하거나 혹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모아 녹여낸 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에세이의 메시지에 대한 나의 공감과 비판이, 또 언젠가는 비슷한 일을 겪었던 기억들이, 가끔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나의 생각이 기록으로 남는다. 기록은 차곡차곡 쌓이고, 나의 감상들은 복잡하게 엮이고, 종국에는 여러 시간대의 내가 켜켜이 겹쳐진 나만의 메시지가 추출된다.
꼭 끌어안은 나만의 메시지를 글로 차근차근 풀어내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글은 머릿속을 떠돌던 나의 생각이 문자화되고, 그 문자들의 조합이 누군가에게 읽혀 인지되는 기다란 과정 끝에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으로 의미가 퇴색되게 하기 위해서는,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은 나만의 에너지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이라니, 플롯의 흥미로움과 당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각이라는 두 개의 관점만이 중요했던 10여 년 전의 내가 보면 꽤나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실용성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가치를 쥐어짜 내던 과거의 습관을 내려놓고 나서야 아름다운 문장들과 그 문장들을 아우르는 유려한 맥락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주한 글 자체의 아름다움은 오직 나만의 기록을 위해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잘라내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빛났다.
이렇게 논리성과, 메시지와, 글 자체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나는 다시 모니터와 키보드 앞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글이 쓰고 싶어 진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이 과정을 수십 번을 반복할 것을 안다. 나는 다시 부끄러워질 것이고, 다시 책을 읽고, 다시 모니터와 키보드 앞에서 고민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과정에서 지겨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용성이나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였다면 수많은 좌절이 중간중간 삽입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글쓰기는 그 자체의 즐거움을 원동력으로 한다. 나만의 논리구조를 바탕으로 한 나만의 메시지가 생긴다는 것, 그 메시지가 그럴듯한 형태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상과 중얼거림으로 사라지지 않고 문자의 형태로 남은 나의 글을 나는 영원히 사랑할 것이며, 이 글을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