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LY Oct 13. 2024

라즈베리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얹은 토스트

    페리윙클 블루 색상의 아침 하늘은 2021년의 나에게 그 무엇보다 친숙한 것이었다. 몇 년간 나를 잠식했던 불안은 아침 해가 떠올라 푸르스름해지는 하늘을 보기 전까지 매일같이 나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대학 졸업은 코 앞에 다가왔고, 대외 활동도, 인턴도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도 취업이라는 압박이 밀려왔다. 수업에서 배운 내용들과 찔끔찔끔 이어오던 활동들을 하나씩 정리하던 그때, 그 어떤 구직 활동보다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직장인이 될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9 to 6라는 새로운 일상을 맞이할 준비가 정말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야심 차게 세운 나의 목표는 바로 '아침 먹기'였다. 낮 12시가 되기 전 중력보다 몇 배는 강하게 느껴지는 침대의 장력을 이겨내고 비척비척 부엌으로 걸어갔다. (너무 헐렁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침 9시에 겨우 잠들던 나에겐 꽤나 어려운 목표였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어 라즈베리 잼과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식빵을 꺼냈다. 야무지게 묶어 둔 빵 봉지를 열어 식빵 두 조각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고, 에어프라이어가 돌아가는 시간 동안 커피를 내렸다. 좋아하는 바닐라 시럽을 두 펌프 가득 짜낸 다음 얼음과 우유를 넣으면 어느새 빵이 약간 바삭하게 구워져 있다. 구워진 빵을 무늬 없는 하얀색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했던 접시 위에 놓고, 실온에 적당히 부드러워진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얹는다. 기분 좋은 우유 냄새가 훅 끼치는 클로티드 크림 위로, 새콤한 향이 코를 찌르는 라즈베리 잼을 한가득 얹어주면, 나의 아침이 완성된다. 


    이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맛만을 듬뿍 담아 개발해 낸 아침이다. 씨가 씹히는 새콤 달달한 라즈베리 잼은 아침잠에 금방이라도 다시 감길 것 같은 눈을 뜨게 해 준다. 새콤한 맛이 아침부터 혀에 너무 자극적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빵 위에 도톰하게 올려진 클로티드 크림이 부드러운 우유 맛을 더해 부담스럽지 않은 상큼함을 완성한다. 여기에 빵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버터향까지. 나름대로의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하는 이 메뉴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때마다 대접하였던 나의 비밀 레시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나의 아침 식사 목표는 '칼로리는 낮으면서 든든하게'였다. 이상한 점을 모두 눈치챘을까? 칼로리는 낮으면서? 설탕을 가득 담아 졸인 잼, 유럽 연합에서 지방 함량이 최소 55%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는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버터를 가득 넣어 구운 식빵까지. 어딜 봐도 다이어트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레시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메뉴를 1년간 꾸준히 아침으로 먹은 이유는 단순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악몽을 싫어하는 마음보다 라즈베리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얹을 토스트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악몽이 무서웠다. 잠에 들면 온갖 악몽을 꾸곤 했는데, 그 누구도 나를 깨워줄 수 없는 상황에 무기력하게 놓이는 것이 두려웠다. 심지어 악몽에서 도망쳐 깨어난 시각이 해도 뜨기 전의 밤이라면? 그 두려움은 몇 배나 증폭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새벽 내내 깨어있게 되었다. 무서워서 눈을 감지를 못했다. 그렇게 해가 뜰 때쯤, 약간의 안도감이 몰려옴과 동시에 기력이 바닥까지 소진된 몸은 버티지 못하고 잠에 들곤 했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 오후 늦게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반복하기를 몇 년, 나는 F를 겨우 면할 수업 출석률을 가질 정도로 일상생활이 엉망이었다. 그런 나를 일으킨 것이 다름 아닌 라즈베리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얹은 토스트였다. 시끄러운 알람을 듣고 다시 자려다가도 이 맛을 생각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몸을 이끌고 잼과 크림, 식빵을 꺼내기를 반복했다. 


    비슷한 아침을 반복하며 좋아하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하루 중 가장 힘겨운 시간이었던, 나를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워야 했던 아침을 스스로의 힘으로 맞이하게 하던 힘은 거기에 있었다. 이 깨달음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것 찾기'는 나의 제1 과제가 되었다. 애정이 솟아나는 것들로 조금 덜 사랑하던 나와 내 주변을 채우고 있다. 동시에 스스로의 취향을 알아가며 나와 조금씩 친해지고 있다. 요즈음의 나는 출근 전 달달한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출근전날 밤엔 용기를 내어 눈을 꼭 감으며 아침에 마실 커피를 상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