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SF 영화 <유랑지구 Wandering Earth>를 둘러싸고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것은 흥미롭다.
올해 춘제 최고의 히트작인 이 영화가 올린 중국 내 흥행수입은 45억 위안 이상, 한화로 약 8천억 원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다시 한번 중국의 마켓 사이즈에 대해 경악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유일의 휴고상 수상자인 류츠신 보유국에 대한 부러움의 시선이 있다.
태양의 노화로 인해 지구의 몰락이 눈앞에 온 시점에서 중국 작가의 상상력은 어느 누구는 구하고 누구는 희생시키는 선택 대신에 지구를 통째로 태양계 밖으로 옮기는 방법에 까지 이른다.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의 작가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온 SF의 긴 역사 속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빛나는 독창적인 상상력이다.
아무리 독창적이고 훌륭한 상상력이더라도 그걸 구현할 방법(기술 및 버젯)이 없다면 그림의 떡이라는 한탄은 한국 SF 팬이나 SF작품을 만들길 원하는 영화인들 사이에서 자주 들리는 소리이다.
그런데 <유랑지구>는 소리 소문 없이 준비하고 만들어서 개봉 후, 적어도 비주얼만은 할리우드 부럽지 않다는 평을 나라 안 밖에서 받고 있다.
<유랑지구>에 대한 악평도 당연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주로 플롯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것과 과학적 정합성에 대한 것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렇다면 중국 영화계는 무슨 방법으로 이런 깜짝쇼에 성공한 것일까?
한국 영화계에서도 다양한 단계(기획개발, 캐스팅 및 펀딩 혹은 프리 프로덕션 등)에 와 있다는 여러 편의 SF 소식이 들리는 마당이므로 반면교사 삼아 살펴보자.
이 작품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베이징 영화사는 류츠신의 <유랑지구>를 글로벌 SF 프로젝트로 기획하고 애초에는 유명한 외국 감독을 섭외하려고 했다는 소문이다.
그 리스트에는 제임스 카메론이나 뤽 베송, 알폰소 쿠아론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거절한 후 우연한 기회에 겨우 단 두 편의 연출 경력뿐이었던 곽범(Frant Gwo)에게 기회가 왔고 평소 이 작품의 팬이었다고 하는 곽 감독과 그의 팀은 밤을 새워 트리트먼트를 만들었고 베이징 영화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SF 영화 연출의 경력이 전혀 없었던 감독의 이력 때문에 감독 낙점 이후에도 투자와 제작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완성된 영화가 보여주는 스케일과 비주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버젯(추정 500억 원)으로 영화를 완성해야 했고 촬영 중에 버젯이 계속 오버되면서 메인 투자자였던 완다그룹이 투자를 철회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성공할 운명이었던지 이런 악재를 극복할 수 있는 많은 도움의 손길도 닿았다.
<유랑지구>가 펀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주연배우 오경(Wu Jing)이 부족한 제작비의 일부를 개인 투자함으로써 ‘구원의 천사’ 역할을 했고 외국의 훌륭한 기술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웨타워크숍이 우주복 등 영화 의상 및 소품 제작 등 여러 면에서 기술 제공을 했을 뿐 아니라 프로덕션 헤드를 파견해서 제작을 도왔고 그 외에도 러시아 한국 등 여러 나라의 CG팀의 도움을 받았다.
그 결과 투자를 주저했던 여러 투자사들이 뒤늦은 후회를 할 만한 흥행 대박(역대 흥행 2위)이라는 성공을 이루어냈다.
할리우드 못지않은 비주얼이라는 찬사는 흥행 대박만큼이나 제작진에게는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과학 굴기를 영화로 보여준 작품이라는 중국 사람들의 호들갑에 비해서 외부의 시선은 냉정하다.
‘중국이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옮겨서 구한다고? 설마...’라는 것이 가장 시니컬한 반응이라면 조목조목 영화의 만듦새를 지적하는 리뷰도 많이 눈에 띈다.
할리우드가 그동안 수없이 보여준 국뽕을 중국이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할리우드의 미국 중심주의는 긴 세월 점차 촌티를 벗고 세련되게 제련되어 왔기 때문에 요즘에 와서는 쉽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숨기는 실력이 늘었다는 점이 다르다.
제련과정은 플롯의 정교화와 설득력 있는 캐릭터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점에서 <유랑지구>는 거칠다.
2시간짜리 영화 속에 너무 많은 플롯과 인물을 구겨 넣으려는 시도가 무리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2시간을 그런대로 즐기면서 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 작품이 SF라는 장르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훌륭한 원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원작의 향취를 비주얼로 잘 옮기려는 노력 덕분이다.
SF 팬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망망한 우주에 홀로 떠있는 지구의 외로움과 관련된 서사이다.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는 유일한(아직은) 지구 앞에 닥친 운명이 지구를 낳고 키워온 태양계를 탈출하는 것이라니!
이 보다 더 처절한 운명 드라마가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외롭고 절박한 운명을 멋진 콘셉트 디자인과 영화 미술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SF 영화다운 설정과 그 설정을 관객에게 설득시킨 비주얼이 빈약한 플롯 전개와 캐릭터를 구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은 현재 한국의 <유랑지구>를 꿈꾸는 모든 영화팀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젊은 감독이 야심 차게 이룬 <유랑지구>가 다소 서툰 플롯과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주고 있는 지점이 한 편으로는 한국 영화인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