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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Feb 06. 2021

누군가라도 해야 할 이야기

쓰지 못한 기사, 동물실험

 기자로 일하게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2015년의 여름이었다.

 6개월하고도 두 달 동안 사회부 사건팀에서 '마와리'를 돌다가, 처음으로 정식 배치 받은 부서는 소비자경제부 유통팀이었다.

 선배들은 유통팀을 보고 종종 '경제부서의 사건팀'이라고 말했다. 유통팀이란 말 그대로 유통과 관련된 기업, 플랫폼, 소상공인의 문제까지 다 다루는 곳이었다. 평상의 생활과 접점이 많으니 그만큼 해야 할 이야기도, 고발해야 할 것도 많다는 뜻이었다.

 사건팀의 군기가 빠지지 않았던 나는 어느 날 부서 전체 발제 회의(다음 주에 어떤 기사를 쓰겠다고 부서원 전체 앞에서 계획을 발표하는 회의다.)에서 호기로운 발제를 하나 꺼냈다. 동물실험에 대한 기획 기사였다.




 2014년 두어 달 동안 잠깐 채식을 하며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도 어깨너머로 들어본 적 있던 나였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크루얼티', '크루얼티프리'라는 것은 알지도 못했다. 어렴풋이 화장품을 개발할 때 안전성 검증을 목적으로 불쌍한 토끼나 개에게 생체실험을 한다는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내 굴지의 화장품 대기업이 메일로 뿌린 보도자료를 받았다. 자신들은 화장품을 만들 때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윤리적인 기업이라는 내용이었다.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제품을 하나 둘은 갖고 있을 유명 회사였고, 나 또한 꾸준히 써 오던 화장품을 만드는 곳이었으므로 조금의 뿌듯함을 느꼈다. (알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제품을 써 오고 있었던 스스로를 칭찬하며,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또 다른 화장품 브랜드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그들이 말한 '윤리'는 국내 시장에서만 통용되는 반쪽짜리였다. 중국 시장에 제품을 팔고 싶은 외국 화장품 기업은 무조건 동물실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해당 보도자료를 배포한 기업은 'K-뷰티'의 선봉에 서서 해외, 특히 중국 시장에 한국 화장품을 전파하고 있었던 회사였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비싼 값에도 불티나게 팔리는 그 회사의 화장품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혹은 싸게 사서 비싸게 되팔기 위해 보따리를 짊어지고 한국에 오기까지 했다. 자기네 제품에 열광하는 거대한 중국 시장을 위해, 앞에서는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착한 기업'인 척 하며 뒤로는 동물의 눈을 강제로 뜨게 하고 그 안에다가 샴푸와 마스카라를 쏟아 붓고 있을 것은 불보듯 뻔했다.




 사기업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합법적인' 동물실험을 한다는데, 어느 누가 문제를 삼을 수 있겠냐만은(사실은 이것도 큰 문제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불쌍한 동물들로 실험 하지 않는 착한 기업이에요" 하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 뻔뻔함에 치가 떨려서 이걸 꼭 기사로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조금 더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카라'에서 작성해 놓은 '동물실험 하는 브랜드' 리스트를 찾아냈다. 2015년 당시에는 '동물실험'이라는 주제에 관해 2021년 지금만큼 구체적이고 열린 정보를 찾는 게 힘들었고, 그나마 공신력 있는 단체에서 정리를 한 것이 카라의 리스트였다. 조금 더 내용을 알고 싶어 카라 측에 전화를 했다.

 지금도 동물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는 어떤 분과 연락이 닿았다.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기사의 방향에 대해 환영해 주셨고, 모 기업이 중국 시장에 제품을 팔고 있으면서도 국내에서는 '윤리적 기업'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 대해 공분해 주셨다. 하지만 워낙에 대기업들이 동물실험에 관한 자료는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라, 동물실험에 대한 정확한 수치자료 등을 찾기 힘든 점에 대해 토로하셨다.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식 기자가 된 지 한 해도 되지 않은 초보는 순진하게도, '우리 동물실험 하고 있어요!'하고 고백하는 대기업 내부의 자료가 없으면 기사를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당 기업에 연락을 했다. 그 역시 한낱 회사원일 뿐이었을 상대방이 "너네 동물실험 하지?"라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나. 중국시장에 들어갈 때 제출해야 하는 서류 혹은 서류 목록들을 알아봐 달라고 하자, 상대방은 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알아본 뒤 꼭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다.

 그 대답을 철썩같이 믿은 나는 그 주의 발제 회의에 동물실험에 대한 기획 기사를 들고 들어갔다. 모두가 이 심각한 표리부동의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이런 중요한 문제를 취재하고자 하는 내 노력을 격려해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부장은 (비)웃었다.

 "야, 그거 우리 신문이 아니라 CNN이나 뉴욕타임즈 1면 감이다!"

 (네 말이 맞다면) 그거 참 전세계적인 해외토픽 감이라는 거였다. 자신만만하고도 진지하게 내 기사의 계획을 설명하던 나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그 때 부장의 생각이 아직도 궁금하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을까? 그렇게 이미지가 좋은 대기업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믿음이었을까? 아니면 굳이 긁어부스럼 만들 기사가 정말로 지면에 잡힐 것 같느냐는 가르침(?)이었을까?

 사실, 국내 화장품 대기업들이 중국 시장에 판매하는 제품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물실험을 하고 있다는 비판은 2015년 이전부터도 동물보호연합 등의 단체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장품을 즐겨 쓰는 대표 소비자인 나는 그걸 미처 몰랐다. 관심이 없었던 나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소비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예쁘게 포장된 정보만 전달하고 있었던 시스템 전반의 문제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제는 그 기업이 뻔뻔스럽게도 의 탈을 쓰고 동물실험 안 한다는 거짓말을 시작했는데, 어째서 그게 기사감이 아니었단 말인가.

 부장은 덧붙였다.

 "어디, 취재 할 수 있으면 해 봐."




지금 생각해 보면 직진 말고 우회로로 어떻게든 기사를 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우리 동물실험 안 하는 착한 기업"이라고 공표했던 그들의 홍보 자료를 보여주고, 중국 정부의 수입 화장품 동물실험 의무 조항을 보여준 뒤, 그 자칭 착한 기업이 중국 시장에 얼마나 많은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적어도 '착한 기업' 코스프레로 순진한 소비자들의 돈을 더 벌어들이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 풀 기가 꺾인 초보 기자는 의욕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믿고 기다리던 대기업의 답변도 오지 않았다. 동물권에 관심이 있는 국회의원실에 연락을 하면 가능할지도 몰랐으나, 그 때는 그 방법을 알지 못했고 하루하루 쏟아지는 일거리들에 그만 나의 야심찬 기획 기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기자를 그만두고 나온 지금 생각했을 때 가장 아쉬운 기억은 이 동물실험 기사를 쓰지 못했던 것이다. 뭐 거창하게 CNN이나 뉴욕타임즈를 뒤흔들 단독을 놓쳤다는 그런 게 아니다. (그 때부터 동물권 신장을 위해 힘 쓰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거창한 주제도 아니었고.) 꼭 써야할 이야기를,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이야기를 전국에 배포되는 지면에 싣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다.

 다만 다행인 점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해 나보다 더 조리있게 보도해 주는 다른 기사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최근 중국 정부가 수입 화장품에도 동물실험 의무조항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나면서 6년 전에 내가 쓰고 싶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걸 읽을 때마다 왠지 모를 뿌듯함까지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라도 해야 할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꼭 나여야만 할 필요는 없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발견하는 기쁨을, 충만하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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