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1.
옷장을 볼 때마다 한탄한다. 몇 년째 입지 않는 옷을 보면 죄책감과 함께, 저 천덩어리가 유동성 높은 자산으로 다시 돌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 겨울 나의 하체는 데님 세 벌을 돌려입고 상체는 회색, 쌀색, 검정색, 혼합색 폴라 니트를 돌려 입는다. 웬만큼 추우면 무조건 패딩, 조금 따뜻하다 싶으면 짙은 파란색과 회색 비스무리한 코트를 입는다. 스타일러를 사고 난 다음에는 돌려막기에 더 거리낌이 없어졌다. 생각보다 브랜드 가방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저것들을 모아다가 딱 하나만 비싼 가방(생로랑 니키)을 사 뒀다면 실용적이었을텐데 싶다. 퇴사하고 난 뒤에는 그마저도 백팩만 드니까… 신발은 여름 샌들 하나, 겨울 빙판길용 닥터 마틴 하나, 그 외 모든 계절용 검정 스니커즈 하나 이렇게만 샀어도 좋았을 걸. 그러면 굽 7센티미터 이상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다가 디스크를 앓거나 자세가 틀어지는 불상사도 없었을텐데.
며칠 전에는 책방 정리를 했다. 대체 왜 사서 나무 살해에 동참했을지 모를 책이 너무 많았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이런 거, 트와일라잇 시리즈 이런 거. 브리태니커 전집을 살 때만 해도 인터넷이 대중화될지 몰랐던 것 같다. 아직 쓸만한 책들을 폐지로 버리지 않고 헌책방에 팔면서 정신승리를 해보려 했으나, 쓰레기를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처럼 인심쓴다는 듯 이만 원을 이체해주고 백 권 가까운 책을 가져가던 사장님을 보며 더 심란해졌다. 내가 꾸역꾸역 사다 모은 것들은 다 뭐였을까.
인테리어랍시고 모은 많은 예쁜 쓰레기들, 어울리지도 않았던 수십만 원짜리 파마, 요리 할 거라는 거창한 선언과 함께 자취방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썩어 문드러져서 나왔던 식재료들, 입은 하나인데 열 개가 넘는 머그잔, 쓰지도 않았던 형형색색 아이섀도우 팔레트들. 지금 생각해 보면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던 때의 나는 10점 만점에 4정도만 마음에 들어도 일단 소비하고 봤었다. 그렇게 사서 초심처럼 잘 썼으면 뭐가 문제겠냐마는, 결과는 구석행 쓰레기통행 당근행. 내가 사다 모은 것 중에 진짜 나한테 필요한 건 10분의 1 정도였다는 사실이 요즘들어 더욱 참담하다. 요새 내 알바 월급이 쥐꼬리만해서 그런가? 근데 분명 경제적 문제를 넘어선 엄청난 죄책감과 현타가 내 집을 잠식하고 있다. (이사를 잠깐 고민하다가 막대한 짐 양에 포기함)
영원한 나의 사랑 강동원은 사복도 잘 입기로 유명했다. 어느 기자가 인터뷰에서 옷 잘 입는 비결을 물었다. 강동원은 옷을 이것 저것 사 보면 잘 입을 수 있게 된다며, 대신 수업료가 비싸다고 대답했다. 이 모든 이십대의 허물들이 값비싼 수업료가 되어주었기에 이런 생각이나마 할 수 있게 됐다는 건 알지만, 그 정도 정신 승리로 퉁치기엔 25~29살 손가인은 많이 한심하다.(심지어 수업료만큼 아웃풋도 안 나온 거 같다.) 이십 대의 감정은 참 소중했는데, 이십 대의 소비는 부끄럽다. 서른 넘은 지 좀 된 맥시멀리스트는 다시 미니멀리스트를 꿈꾼다. 근데 미니멀리즘은 좋지만 그걸 지향하려고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우는 딜레마는 어떻게 해소하는 건지 곤도 마리에에게 물어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