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21.
검정색 슬링백
금액: 6만9000원
새 신발을 사는 것은 정말로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날씨가 채 따뜻해지기도 전에 여름 신발을 3켤레나 사 뒀기 때문이다.
모두 첫 눈에 반해서 무리해 구입해 놓았는데, 정작 3켤레를 신어 보니 모두 문제가 있었다.
가장 먼저 샀던 여름 신발은 발목을 묶는 끈이 있었고 3~5cm 정도 되는 굽이 있는 흰색이었다. 날씨가 살짝 더웠던 날 그 신발을 신고 외출을 했는데 발목을 감싸는 딱딱한 끈 때문에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게다가 색깔도 흰색이고 시원하라고 구멍이 뻥뻥 뚫린 스타일이어서 출근하려고 신으면 이게 바캉스를 가는 건지 출근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두 세 번째 샀던 신발들은 1번 신발보다 더 노출(?)이 심한 샌들이다. 하나는 무난한 검정색이고 발도 아주 편해서 주말에 애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발가락과 발등을 감싸는 끈이 말 그대로 밧줄 모양인 아주 감각적인 황토색 샌들이다. 예쁘긴 미친 듯이 예쁜데 걸어 다니면 뒤꿈치를 고정하는 끈이 자꾸 내려가서 불편했다. (신발은 이게 정말 문제다. 걸어 다녔을 때 어디가 불편한지를 알아보려면 우선 그 신발을 구매해야 한다. 그런데 구매하고 조금 신고 다니면 바꿀 수가 없잖아?) 이 두 샌들 모두 아주 아주 예쁘지만 불편하고, 역시 회사에는 신고 갈 수가 없는 디자인이다.
(그러고도 신발을 한 켤레 더 샀는데, 무려 부츠였고 도저히 더워서 신을 수가 없다. 사실 살 때는 약간 미쳐서 ‘여름에도 부츠를 신어야 진정한 패피라고 할 수 있지!’ 하고 자기합리화를 했더랬다.)
사실 ‘샌들을 회사에 왜 못 신고 가?’ 라고 물어본다면 할 말은 없다. 우리 회사는 일반 사무 기업이 아니고 나름대로 ‘콘텐츠 제작자’들이 근무하는 곳이어서 정말 요상망측하지만 않으면 옷차림이 문제 되지는 않을 분위기다. (저만의 착각입니까?) 실제로 발가락이 보이는 샌들을 신은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어쩌면 회사에 샌들을 못 신고 가겠다는 이유로 예정에 없던 검정 슬링백을 갑자기 사 버린 것은, 발가락을 보여주는 게 젖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야하다는 나의 이상한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나는 토 오픈 구두를 싫어했다. 가장 좋아했던 구두는 면접 보러 가는 사람만이 신을 법한 검정색 펌프스. 발가락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너무 창피하게 느껴졌다. 애인 앞에서도 티셔츠는 훌렁훌렁 잘 벗어던지면서 맨발 보여주는 건 그렇게 부끄러웠다. 별로 예쁘지 않은 발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숨기고 싶은 걸까? 사람들은 발을 예쁘게 보여주기 위해 화려한 색깔로 페디큐어도 하고 심지어 발목에 발찌까지 차던데.
커리어 우먼들의 보편적인 여름 신발인 토오픈 힐을 보면 나는 아주 까무러칠 정도다. 신발에 뚫린 작은 틈새로 발가락이 보이는 것도 모자라 강렬한 색깔의 페디큐어까지 칠해져 있다면! 나에게는 그게 기절해버릴 만큼 야하다.
차라리 발등과 발가락이 함께 보이는 샌들은 견딜 만 하다. 여기저기 골고루 노출돼 있어서 여름용 신발이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주말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불특정 다수 앞에 나설 때(쇼핑몰 탐방이라든지)에는 샌들을 꽤 잘 신는다. 그러나 여름에 사무실에서 신을 신발을 찾자니 샌들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앞서나간 것 같고, 오피스 룩에 걸맞은 토오픈 슈즈는 너무나 야시꾸리했던 것이다!!!!
어제 출근할 때에는 요즘 들어 자주 신던 힐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먼 거리를 높은 힐 위에 위태롭게 올라탄 채 걸어다녔더니 무릎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신발장 앞에 서서 한참 굽 낮은 신발을 찾아 헤맸다. 도저히 신을 게 없어 무인양품에서 산 흰색 하이탑 스니커즈를 신었다. 하루 종일 신발 안에서 사우나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러다 오후에 지나던 가게에서 이 슬링백을 발견하고 그냥 한 번 신어나 보자 하는 순간, 맨발에 찬 공기가 닿는 느낌이 너무나 상쾌했다. 그냥 이거 주세요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신발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은 것 같은데, 부고가 너무 빨리 들려왔다. 문자를 받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음이 꽤 울리다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가 떴다. 뒤이어 국문과 선후배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빈소에 몇 시쯤 갈 거냐고 일정을 조율했다. ‘내일 뭘 입고 출근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단정한 검정색 신발이 방금 산 슬링백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충동적인 구매를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그러면 안 되는 건지 어지러워졌다. 이상하게 엄청 예뻤던 버건디 색깔보다 검정색을 사고 싶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