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팸 주먹밥
금액: 3000원
아침 이른 열차를 타느라 새벽에 눈을 떴다. 정말 빠른 새벽이었는데도 공항철도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앉은 사람 선 사람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하품하느라 쩍쩍 벌리는 입 속이 가득했다.
결국 홍대입구역까지는 꼼짝없이 서서 갔다. 그럴 여유가 있겠냐마는 혹시 몰라 읽으려고 챙긴 보스토크 이번달 잡지와 머플러, 파우치, 양치도구 등등을 쑤셔넣은 터라 무거운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둘러 멘 채로.
피곤에다가 허기까지 겹쳤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주먹밥 집이 보였다. 그 순간 '아,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은 바로 주먹밥이었어!' 하고 느낌이 왔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뭔가 너무 먹고싶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거나 먹자니 이건 아닌게 확실한데 찾기 어려운 때. 그러나 운이 좋다면 뭔가 너무 먹고 싶은데 갑자기 그 음식이 번뜩 떠오르거나 무심코 눈 앞에 보일 때도 있다. 오늘의 경우는 마지막 상황이었다.
주먹밥 특유의 꼬들꼬들한 밥알이 어릴 때부터 좋았다. 주먹밥이라면 으레 뿌려져 있는 김도 좋았다. 주먹밥이 주는 특유의 둥글둥글한 느낌도 좋다. 삼각김밥은 맛이 좋지만 둥글지 않아 자주는 안 먹는다. 공 같은 밥을 한 쪽 귀퉁이부터 야금야금 파 먹는 재미를 또 누가 알아 주려나 모르겠다.
눈 앞에 보인 주먹밥 집의 참치 마요 주먹밥을 집어 들었다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전에 한 번 같은 가게에서 같은 메뉴를 사 먹어봤는데 밥은 내 주먹보다 크게 뭉쳐놓고는 참치는 공 위에 반 숟갈 정도 올려놓은 게 다였다. 기대를 놓지 않고 아무리 속을 파 내려갔으나 끊임없이 밥알 뿐이었다.
김밥집과 볶음쌀국수 집을 기웃거리다가 결국엔 다른 주먹밥 집에서 스팸 주먹밥을 샀다. 값도 3000원밖에 안 했다. 먹기 좋으라고 크기가 딱 맞는 종이컵에 밥을 넣어 뚜껑을 닫고 숟가락까지 줬다. 열차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주먹밥을 열었다. 행복한 마음으로 주먹밥을 파 먹기 시작했다.
주먹밥의 최대 단점은 속을 파 보기 전까지는 내용물이 얼마나 들었는지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악용해 재료비를 아낀다. 큰 기대를 하고 사 먹었던 수많은 주먹밥이 그러했듯, 3000원짜리 스팸 주먹밥 역시 부실한 내용물로 나를 실망시켰다. 주먹밥의 태생적 한계다. 직접 집에서 내 주먹으로 만들지 않는 한, 밥과 내용물의 비율이 적절하게 구성된 주먹밥은 더 이상 먹기가 힘들게 됐다.
스팸 주먹밥이지만 단순히 스팸만 넣은 게 아니라 단무지도 들어있었다. 그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서도 다시는 주먹밥에 돈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 KTX 열차표 환불 수수료
금액: 1만1400원
병원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만났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더구나 그 병동은 간호간병통합병동인지 뭔지를 시행해서 보호자들이 환자 옆을 주구장장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해진 면회 횟수는 하루 한 번. 시간은 저녁 8시. 원칙적으로는 그 때가 아니면 가족이 환자를 만날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손주가 내려오고 있다고, 점심 먹기 전에 도착할 거라고, 이번 한 번만 오전 면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새벽 열차를 타고 아침 일찍 부산에 내려 곧장 병원에 갔더니 곧 환자들의 점심 식사 시간이 왔다. 어느 보호자도 호들갑 떨지 않는 고요하고 차분한 병실에 더 눌러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할머니가 혼자 계신 집으로 가 보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내심 쓸쓸했는지 "느그 마음대로 해라" 하며 고개를 슬쩍 돌리셨다. 아빠가 "할아버지 정신이 멀쩡하실 때 보는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말 해 준 탓에 인사를 하고 나오기가 꽤나 힘들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할아버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갈 때도 "얼른 낫아가 나오소" 했단다. 이제부터 좁은 잔디 마당이 딸린 2층짜리 집에서 적막을 견디며 살아야 할 할머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할머니는 천진난만하게 "고양이는 잘 크느냐" "너도 민주당을 좋아하느냐" 같은 질문을 하며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으셨다.
병실이 나지 않아 이틀 밤을 새운 아빠는 저녁 면회 시간을 맞춰 또 다시 병원으로 갔다. 할머니도 따라 가겠다고 하셨다. 지금쯤 병원에서 코에 호스를 끼우고 온 몸이 아프다고 신음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대면했을텐데 할머니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장면을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면회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아빠 차에 얻어 타느라 부산역에 도착한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빨라졌다. 오후 8시 5분에 출발하는 열차표를 끊어놨는데 7시도 되지 않아 도착해버렸다. 내일 출근도 해야하니 시간을 당겨야겠다고 생각했다. 7시 15분 표를 다시 사기 위해 미리 사 둔 표를 취소했더니 수수료만 1만1400원이 나왔다. 한 시간도 넘게 남은 표를 취소하는데 무슨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물어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취소했다. 엄마에게 수수료를 이야기했더니 너무 비싸다고 나에게 화를 내었다. 나는 1만 원으로 시간을 샀다고 생각하자고 했다. 시간이 금이라는데, 한 시간을 만 원에 산 거면 꽤 괜찮은 거래일 지 모른다고.
우습게도 어제 구매일기에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는 11만9600원인데, 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차는 11만3600원이냐며, 6000원 어치만큼 마음이 가벼워 져서 귀경하게 되는 것일까 하고 적어뒀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6000원을 덜 낸 게 아니라 5400원을 더 내게 됐다. 돈으로 마음 무게의 경중을 따지는 게 웃긴 일이지만 결국 내려 갈 때보다 마음은 더 무거워져서 올라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