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침대 위 취준생 Apr 14. 2020

그들은 가끔 나보다 어려졌다.

나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소년의 경우]

 27, 지금의  나이, 이보다  전에 아버지는 벌써 가족을 부양하였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나는 나를 책임지기도 버거운데, 그는 묵묵하게 우리를 짊어졌다. 아버지에게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엄청난 부를 배경으로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할  있게 그가 닿을  있는 곳까지 열심히 걷고, 걷고  걸었을 뿐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수능을 준비할 무렵, 가정 형편이 조금 좋지 않았다. 나는 다니던 학원과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고(사실 나는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철없게 좋아했다.), 막내는 딱히 먹을  없던 냉장고 문을 여닫을 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모습에 절망하셨다.  많은 것을 배울  있던 나에게 기회를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하여, 한창  나이에  많은 것을 막내에게 먹이지 못했던 것에 대하여 그는 자책하였다.

 어느  늦은 , 잔뜩 취해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자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미 깨어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애써 자는 척을 하였다.   흔들어 깨워도 내가 일어날 생각이 없자 그는 가만히 옆에 앉아 잠드는가 싶었다. 조용함에 나는 실눈을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시작은 조용한 떨림이었으나 떨림은 점차 심해지더니 결국 그는 눈물과 함께 터진 마음을 잠든 나에게 고백하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아버지의 눈물이 덮쳐오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항상 진지하고 엄하시며 눈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그가 통곡하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이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창밖이 푸르스름해질 때까지 잠들지 못했고, 다음날 눈을 뜨자 아무렇지 않게 식탁에서 해장하시는 아버지를   있었다. 다시 내가 알고 있던 그로 돌아오셨다. 전날  그가 흘린 눈물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되었다. 가끔 나는 그때 아버지께서 흘리신 눈물을 떠올린다.  눈물의 무게를 두고두고 간직하기 위하여 나는 소년처럼 흔들리던 아버지의 등과 젖은  그리고 ‘미안하다.’ 말을 하기 위해서 내려놓은 그의 시간을 기억한다.


[소녀의 경우]

 우리 가족은 여행을  다니질 못한다. 아버지는 휴가를 내기 어려우시고 둘째 아들은 서울에서 나는 부산에서 각자 살고 있으며 막내는 공부하느라 가족 모두가 모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여행을 가면 지으시던 엄마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차가  막혀도, 날씨가 좋지 않아도 종일 웃음을 붙잡아두셨다. 요즘은 부쩍 막내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도 느신  같다. 멀리서 안부 전화라도 자주 드리는데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으신지 밥은 먹었나, 반찬은  떨어졌나, 여수엔 언제 내려오나 물어보신다.

 지난번에 본가에 내려가서 괜히 엄마에게 영화나   보러 가자고 말했더니 날씨가 좋지 않아 집에서 쉬자고 하셨다. 옛날엔 비가 오더라도 나가는  즐기신  같은데 나름 젊다고 생각한 그녀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그런 모습을 가까이서 챙겨 드리지 못하는  죄송하다. 가끔 회식이나 친구분들과 모임은 꾸준히 가시는데 노래방에서 재미있게 노시는 모습을 보면 한시름 놓이기는 한다.
 
 지금 나는 여수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얼마  엄마가 내게  것들도 있고 반찬도  가지고 가라고 하셨는데, 딱히  이유 때문은 아니라 그냥 오랜만에 집에 가고 싶었다. 평소에는 그냥 잘살고 있다고 하면 ‘그래, 알았다.’ 하시던 엄마인데 이번 주에 오라고 하시는  보면 오랜만에 아들내미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 보다.(그냥  착각이라면 내가 엄마를 보고 싶은 거로 하겠다.)

 나는 휴대폰에 엄마를 ‘어무니라고 저장해놨지만 ‘엄마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아빠보다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당연한  같지만, 이편이 조금은  엄마를 표현하는  같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존중의 의미라면 ‘엄마라는 단어가 친근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에  포근함을 매번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그렇다고 엄마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 아직은 젊고 싶고,  때문에  동생들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많으신 엄마. 그래서 우리가 쉽게 즐기던 하나하나에  많은 기쁨을 느끼고 즐거워하신 엄마.

 요즘은 하루에  번씩은 괜히 연락을 드린다. 전화가 연결되면 엄마의 첫마디는 항상 ‘?’였다. 혹여나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했나 싶어서 물어보시면  대답은 ‘그냥.’. 매일 똑같은 대답을 전하는데도 전화가 오면 괜히 걱정되시나 보다.  ‘그냥 그냥이 아닌데, 나는 열심히 일하러 다니고 있고, 끼니도  챙겨 먹고, 놀기도  놀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할 시간 줄여 좋아하시는 것들 하시라고,  때문에 놓친 시간 이제는  시간을 드릴 터이니 가져가시라고. 없는 연락에 걱정하실까 내가 먼저 연락을 드리는 것이니 당신은 마음 놓으시라고.  ‘그냥 그냥이 아니었다.

 ‘소녀하다.’라는 동사는 없지만, 우리 엄마는 소녀한 엄마다. 노래하기를 좋아하시는, 여행을 즐기시는, 영화 보기를 좋아하시는, 내가 모르는 엄마가 젊었을  즐기셨던 모든 것들을 아직도 꿈꾸고 좋아하시는 엄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보는 엄마는 언제나 젊고 소녀다운 엄마로 남아계실 테니까.





[소년과 소녀]

 나는 그의 눈물에서 소년을 보았고, 그녀의 웃음에서 소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어린 모습을 숨길  알았고, 우리를 위해 어른으로 살아야 했다. 언제나 강하고 믿을  있는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여린 눈물을 숨겨야 하였고, 우리들의 웃음을 위해 어머니는 자신의 웃음을 희생하였다. 그들은 어른이자 나의 부모님이셨지만, 가끔 나보다 어려졌다. 다행이었다. 단단한 마음이 부러져 그가 절망하기보다 소년으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을  있었음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표정이 사라지기 전에 소녀로 돌아가 웃음을 지을  있었음이. 그들은 가끔 어려져 소년과 소녀로 보였지만, 이는 그들이 가족을 위해   어른이 되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언제고 그들이  늙고, 나에게도 아내와 아이들이 생기면 그들이 걸었던 길처럼 가끔은 누구보다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그것이 내가 가족을 위해,   어른이 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더욱이.
 

작가의 이전글 23개월, 나의 소방일기(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