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리포터 성지순례기
사실 조카의 첫 해외여행은 성지순례의 목적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에든버러는 세계 최대의 축제라는 타이틀보다 조앤 롤링Joan K. Rowling이 해리포터를 탄생시킨 곳이라는 타이틀로 더 유명해졌다. 해리포터 덕후인 조카는 고모가 일하는 곳이 우연히도 그 ‘성지=에든버러’라는 사실 덕분에 부모님 없이 떠나는 첫 해외여행에 대한 결정이 조금은 쉬웠을까?
조앤 롤링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생후 4개월 된 딸과 함께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활보조금으로 연명했다는 이야기. 난방비가 없어 추위를 피해 카페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일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성공으로 백만장자가 된 그녀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세계 최고 부호 클럽’의 멤버이기도 하다. 해리 포터의 판타지보다 드라마틱한 현실의 성공신화에 사람들은 더 큰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죠지 포쓰 브리지 George IV Bridge에 위치한 카페 앨러펀트 하우스The elephant house의 창문에는 ‘해리포터의 탄생지(Harry potter’s Birth place)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조앤이 해리포터의 초안을 집필한 곳이라 홍보하고 있는 곳이지만, 찐팬들은 이곳이 진정한 성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앤은 1993년에 에든버러로 이사해 해리포터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카페는 1995년에 문을 열었다. 아마도 그녀는 ‘비밀의 방’을 집필할 때쯤 이 카페를 자주 이용하게 됐을 것이다.
그녀가 ‘마법사의 돌’을 쓰기 시작한 곳은 니콜슨 스트리트Nicolson St. 6a에 위치한 니콜슨 카페였다. 지금은 스푼Spoon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니콜슨 카페는 그녀의 친척이 운영하던 곳이라 자주 방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 외벽에 조앤 롤링의 사진과 함께 ‘해리포터의 앞쪽 챕터들이 여기 1층(한국 2층)에서 쓰였다’는 내용을 담은 작은 명패가 붙어있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조앤은 글쓰기 좋은 장소로 카페를 꼽았다. ‘커피를 직접 내릴 필요가 없고, 혼자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 곳. 충분히 북적이지만 테이블을 공유할 만큼 붐비지는 않는 카페’. 에든버러에서 그녀가 글을 쓴 곳은 니콜슨 카페와 앨리펀스 하우스 이외에도 트라버스 공연장 카페Traverse Theatre Café가 있다. 8월 축제기간 동안 실험적이고 작품성 있는 공연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한 트라버스는 관객의 신뢰가 높은 곳이다. 나도 매년 이 공연장의 브로셔를 자세히 읽으며 흥미로운 신작 관람을 빠뜨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조앤은 유명인사가 된 이후로 사람 많은 카페에서 글쓰기가 힘들어지자, 카페 대신 5성급 호텔인 발모럴호텔The Balmoral Hotel의 552호에서 머물며 글을 썼다고 한다.
작년 코리안 시즌 공연을 보러 온 관객 중 한 한국 대학생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자신이 해리포터 덕후임을 밝힌 그는 에든버러 도시 자체를 너무나 사랑하게 됐다는 말과 함께 “저는 지금까지 조앤이 상상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기 와서 보니, 에든버러의 건물과 거리를 그대로 묘사한 거였네요…”라고 말했다.
조앤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에든버러 곳곳에는 해리포터를 사랑하는 팬들이 만들어 놓은 성지순례 코스가 있다. 죠지 해리엇 스쿨George Heriot’s School은 호그와트의 배경이 되었다고 추측하는 곳이며, 책을 읽으며 유독 좋아했던 ‘다이애건 앨리Diagon Alley’는 빅토리아 스트리트Victoria St.와 콕번 스트리트Cockburn St. 글라스 마켓 Grass market 등 다양한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다.
에든버러는 도시 전체가 영화 세트장 같은 곳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의 고풍스러운 조지아풍 건물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경험이 된다. 골목골목 거리를 걷다 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다이애건 앨리를 만나게 된다.
에든버러 성 사건 이후, 나는 조카와 함께 매일 산책하듯 도시를 거닐었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공원묘지 그레이프라이어스 커크야드Greyfriars kirkyard는 영국에 오는 친구들에게 꼭 가보라고 권하는 곳으로, 지금은 해리포터 성지순례코스에서 빠뜨리면 안 될 곳이 되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장소 ‘공원’이라 이름 붙인 영국의 공원묘지(공동묘지)는 죽음의 무게를 서서히 덜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이 나의 일상과 함께 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더 반갑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묘석의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 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은 스펠링만 보고는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그럴 땐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Excuse me’로 웃으며 말을 걸면 된다.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다가와 발음을 세 번쯤 반복해 들려주는 할머니에게서 묘지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작은 횡재를 경험할 수도 있다.
조카는 몇몇 묘지 위를 덮고 있는 철창을 보며 꽤나 무서운 상상을 하는 듯 보였다.
의과대학이 유명한 에든버러에서는 다른 지역의 공원묘지에서 볼 수 없는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해부용 시체가 부족한 학생들이 공동묘지의 시체를 도굴해 사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굴 방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철창을 바라보았다. 왜 이곳이 수많은 명작에 영감을 준 곳인지 분위기만으로 설명이 된다. 해리포터로 주목받기 전부터 이 공원묘지는 ‘프랑켄슈타인’, ‘지킬 앤 하이드’에 영감을 준 곳으로 유명했다.
누가 제일 먼저 찾아냈고 어떻게 알려지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물 찾기를 하듯 묘석의 이름을 읽다 보면 볼드모트의 이름인 ‘톰 리들’과 ‘맥고너걸’ 교수, ‘무디’ 교수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국부론’의 저자이자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묘지와 충직함으로 스타덤에 오른 강아지 ‘바비’의 무덤도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방문했다가 이야기 종합선물세트를 받아올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조앤은 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캐릭터 이름들을 여러 장소에서 수집했다고 말했다. 지도 위 거리 이름을 가져온 경우도 있고, 오래된 책 속 인물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름, 성인들의 이름을 사용한 경우도 있고, 묘석에서 본 이름이 우연히 기억에 남아 사용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톰 리들의 이름을 이곳의 묘석에서 가져왔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팬들의 애정 어린 시선이 그 이름들을 발견하고 어느새 곳곳이 성지가 되어가는 ‘진실 아닌 진실’이 그리 억지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성지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은 기념품 가게일 것이다.
조카의 방문 기간 동안 나는 그를 ‘중국 부호’라고 불렀다. 해외 공연을 가면 배우와 스텝들에게 지급하는 퍼디엠Per diem을 조카에게도 지급(?)했고, 조카의 퍼디엠은 매일 고스란히 해리포터 샵에 상납되는 것 같았다. 매일 두 손 무겁게 집으로 돌아오는 후덕한 그의 얼굴엔 빈틈없는 행복이 묻어났다.
에든버러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는 서점 중 블랙웰스 북샵Blackwell’s Bookshop은 집에서 뛰어가면 2분도 걸리는 않는 거리에 위치한 서점으로, 다양한 분야별 책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페이퍼블랭크paper blank의 노트들과 문구류도 판매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 해 서점의 진열장에는 님프스2000과 덤블도어의 지팡이가 진열되어 있었고, 나는 조카 덕분에 내가 사랑하는 이 서점에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특별판과 몇몇 고가의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카는 물욕(?)이 있는 아이가 아니다. 명절에 용돈을 주어도 금액에 큰 관심이 없었고, 뭘 갖고 싶다고, 사달라고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에든버러에서도 본인의 퍼디엠 내에서 군것질을 포기하고 덕후의 본업에 충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날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카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못 박힌 그의 시선, 애정 가득한 눈빛이 딱 한 곳에 닿아 있었다. 덤블도어 지팡이. 느낌이 왔다. ‘아… 저건 사줘야겠구나’
“저것 좀 보여주실래요? Can I have a look?”
나는 진열장에 있는 덤블도어 지팡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점원에게 꺼내서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는 박스를 조심스럽게 꺼낸 후, 티파니에서 고급 주얼리를 만지는 사람처럼 흰 장갑을 끼고 지팡이를 곱게 싸고 있는 실크를 걷어냈다. 나의 머릿속은 조카의 벌어진 입 사이로 금방이라도 침이 흘러내릴 것 같다는 만화적 상상을 했고, 지팡이보다는 조카의 반짝이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탁월한 선택이었고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8월의 에든버러에서는 어떤 복장을 하고 다녀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연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의상과 화려한(혹은 희한한) 분장을 하고 활보하는 아티스트들의 천국. 매일이 할로윈이고, 낮부터 밤까지 가면무도회가 펼쳐지는 듯한 이 도시에서 조카는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매일 교복처럼 해리포터 망토와 모자, 그리핀도르 목도리에 덤블도어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조카에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리핀도르에 10점 추가. 10 points for Gryffindor’라고 말하며 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떤 표현도 비난받지 않는 곳.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받아들여지는 곳. 조카의 표정을 보니, 그는 이곳에서 ‘그냥 나 자신이기만 해도 괜찮다’는 만고의 진리를 깨달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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