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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Oct 22. 2023

럭키언럭키연대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회사


새끼손가락을 건듯 금요일이 돌아온다는 것만으로 달뜨는 목요일 아침이었다. 비소식에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좋아하는 커피로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게다가 어젯밤에 좋아하는 작가님으로부터 선물이 도착해 감사 인사를 아침 메시지로 보낼 생각이었기에 조금 더 신이 나 있었다.


평소라면 사이렌오더를 한 후 커피만 얼른 받아왔겠지만 선물 받은 쿠폰을 쓰자면 내가 원하는 커피에 대해 주절주절 요청 사항을 전달해야 했다. "저, 바닐라 플랫 화이트 숏사이즈에 샷 하나 추가해 주시고 시럽은 하나만 넣어주세요. 폼도 많이 부탁드릴게요." 파트너는 내가 요청한 내용을 낮고 빠르게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음료 제조에 들어갔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이 닉네임이 불러졌고 "폼을 많이 올려드리긴 했는데 부족하시면 말씀해 주세요."라며 컵을 건네는 착한 눈의 사람이 웃었고, 나도 웃었다. '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맛과 친절!' 작은 감동을 뒤로한 채, 회사 입구에서 카드키를 타각하고 조금 더 걸으니 오종종 모여있는 도토리들이 보였다. 나무에 매달려서도 떨어져도 한결같구나. 한 손엔 커피를 들었지만 남은 빈손이 있었기에 도토리를 하나 둘 주으며 걸었다. 출근길 커피와 도토리의 조합이라니, 자전거 없이도 빠르게 출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날이었다.


"오늘 비가 제법 내리네요. 낙엽 사이로 조심조심 다니셔요. 그래도 멋진 하루가 될 겁니다." 오고 가는 문장 끝에 작가님의 다정한 마음이 우산이 되어 나를 받쳐주는 듯했다. 시계는 오전 8시 11분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행복의 궤도를 넘어 확신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비가 예상보다 많이 내리긴 했지만 점심으로 파트장님이 사주는 콩나물국밥과 내가 좋아하는 분홍소시지를 넉넉히 주신 식당 아주머니께 감사하며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양치질 후 습관처럼 커피를 내려서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임진아 작가의 <빵 고르듯 살고 싶다>를 펼쳤다. 책의 이름도 어쩜 오늘을 시작하는 마음 같은지 제목 위에 작은 글씨 ‘오늘의 쁘띠 행복을 위해’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유려하게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다정한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몸이 심심해지면 의자를 양 옆으로 요리조리 돌렸다. 지면에서 발을 떼고 사탕을 손에 쥔 아이처럼 조금 신이 난 채로 책을 읽어 내려가고 있을 때, 자리를 비웠던 파트장님이 앉았고 점심시간에 깨어있는 사람이라곤 언제나 둘 뿐이니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려 다가갔을 때 "고마워"라는 말과 함께 무심코 올려다본 모니터 한 면에는 언젠가의 골칫거리처럼 묵혀둔 ppt 속의 글자들이 보였다. 본능이 서둘러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했기에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있다가 팀장님하고 회의를 할 건데, 너를 데려가야 하나?" 하는 말을 못 들은 척 입에 무언가를 잔뜩 넣은 듯 웅얼웅얼 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2시 30분 미팅에 같이 참석하자"는 파트장님의 목소리가 책상과 책상 사이 떨어진 틈으로 굴러 떨어졌다."네" 하고 짧은 대답을 했지만, 어쩐지 마음의 평화가 눅눅한 날씨에도 바사삭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에 울적해졌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걸어 도착한 4층 사무실, 2 site를 운영하고 있는 팀장님이 머무는 공간에서 좀 더 떨어진 작은 회의실에 팀장님, 파트장님 두 분,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앉았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6번, 7번 안건에 도달할 즈음 나는 주문을 외웠다. 어떤 상황에도 흥분하지 말자.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니까. 끝까지 좋아야 해. 반드시 완전무결한 행복의 날로 만들겠다는 다짐은 회의 참석 전 과거로부터 도착한 '벽을 두고 하게 될 대화'에 대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내 말 주머니를 먼저 가로챈 건 팀장님이었다. 그의 요지는 내 말은 너무 길고, 본인은 한 가지만 알고 싶으니 지난 3년 동안 굳이 단 한 번도 없던 예시를 들어 나의 대답을 원했다. 나는 팀장님이 원하는 대답을 할리 없는 성정을 타고났고, 그런 일 또한 없었기에 예시를 들 수 없다고 말했고 여기서 나온 이야기대한 진위 여부만 듣고 싶다면 안건으로 나온 얘기가 틀리지 않다고 했다. 팀장님은 나를 답답해하며 예시를 비튼 후 역시나 본인이 듣고 싶은 말을 제 풀에 꺾여 내가 말해주길 바라는 듯했고, 나 또한 노골적으로 팀장을 답답해하며 "그런 일은 없었다니까요, 있었다면 고민을 해봤겠죠?"만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거울효과로 바라보면서도 못난이들처럼 으르렁 거렸고, 두 파트장님들은 조용히 첨언하거나, 다른 업무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아주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묘하게 우리 둘을 포기한 것만 같았다. 사실 팀장님과 나는 첨예하게 부대끼는 사이가 아니다. 일개의 개미 주제에 나는 할 말 폭격기고 팀장님은 그런 순간이 오면 항상 얼버무리는 것을 선택하는데, 이 양반이 오늘 왜 이리 ‘강강강’인지 그 모습에 너무나 낯설어 동공 지진일 날 지경이었다. 결국 그 회의는 서로의 입장차만 발견하고, 대충 팀장이 원하는 대로 뭉개지고 뭉뚱그려진 채 숙제만 받아 들고 오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쯤 되자 완전무결한 행복이고 뭐고 부르르 떨며 식식거리다가 파트장님께 메신저를 와다다다 썼다.


"아니 제가 색안경 쌍안경을 쓰고 팀장님을 보는 걸까요? 왜 히스토리 없이 원인만 보려고 하는지, 핵심은 저기 멀리 두고 원하는 대답만 들으려 하는지 납득이 안 가고, 분명 회의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다잡고 들어갔는데 저는 이미 광년이가 됐어요."


"그래 너도 좀 흥분하긴 했어. 괜히 휘둘려서 안 해도 좋을 말도 했고.(이부분 때문에 나는 내가 무척이나 싫었다) 그렇지만 팀장님은 원래 그러셔. 너는 이게 낯설지 몰라도 말이야..."


파트장님과의 대화가 끝내고도 일희일비를 등에 업은 채로 씩씩거리며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는 동시에 기억의 회로를 돌렸다. 되새겨 볼수록 기분 나쁜 말, 그럼에도 당시에 하지 못했던 말들까지 생각나자 울화가 치미는 동시에 내가 두 파트장님들 앞에서 팀장님께 너무했나? 하는 마음까지 겹쳐 나에 대한 실망과 회사 생활의 무망감에 넌덜머리가 일었다.


바쁜 중에도 말을 안 듣는 키보드가 부서져라 타 닥타닥타타탁 메일을 써 내려가던 파트장님이 "그만 열내고 그럼 반대로 팀장님께 질문을 이렇게 해봐" 하며 나름 날카로운 문장을 적어줬다. 오늘 다시 팀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차피 그 일은 나의 숙제였기에 파트장님의 질문에 제법 직장인 다운 말을 슬쩍 넣어 메신저를 보냈다.



"팀장님?"

"응" (하여간 대답은 0.1초도 안 걸림)

”오늘 OO 회의요. 상황은 이러저러한데, 원하시는 방향에 대해 알려주시면 가이드를 잡을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응. 나도 몰라 ㅋㅋㅋ"


응? 나도 몰라 ㅋㅋㅋ라고? 회의실에선 평소와 다르게 맹수의 얼굴로 으르렁 거리더니 내가 본 문장의 진위를 파악해 볼 것도 없이 똑똑히 새겨져 있는 '키키키 또는 크크크'가 어이가 없는 와중에 팀장님의 다음 대답은 "파트장한테 물어보자 ㅋㅋㅋ"였다. 뭘? 대체 무엇을? 무엇을 물어보라고? 그 질문을 만들어준 이에게 답을 물어보라고? 나는 더 할 말을 잃었기에 '정말 할 말이 없네?' 하는 이모티콘을 찾아 그에게 보냈고 팀장님의 다음 대답은 또 한 번 어이없게도 "여기 매출이 떨어져서... 정신이 없네..."였다. 이제와 호소야 뭐야? 진짜 어쩌라고? 하면서도 기가차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잠깐이나마 내가 팀장님한테 너무했나? 했던 마음 같은 건 호주머니 깊이 처박아두고 덧니를 드러내며 파트장님 자리로 갔다. "제가 방금 메신저 캡처해서 하나 드렸는데 좀 보세요." 좀 전까지 썽을 내고 있던 애가 웃으며 다가오니 무슨 일이지 하며 <팀장님과 나의 메신저 대화 캡처>을 토끼눈으로 바라보던 파트장님이 웃었다. 그런 파트장님을 보며 나는 또 웃고, 우린 잠시 넋 나간 얼굴로 서로를 보며 웃고 또 웃었다. 후에 내가 더 이상 대답이 없자. 머쓱했는지,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ㅋㅋㅋ"라는 메신저가 팀장님으로부터 다시 도착했다.


언젠가 혀를 끌끌 차며 유가 했던 말은 “너는 기운도 좋다. 뭘 그리 일희일비해?”였고, 나는 그녀의 말을 육성을 듣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러게 말이야"하고 대답할 뻔했다.


눈치 없는 팀장의 ㅋㅋㅋ 때문일까?,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휘둘렸다는 자괴감 때문일까?, 와중에 파트장님은 "바빠 죽겠는데, 뭘 나한테 물어봐!" 하며 눈꼬리에 달을 매달고선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허무가 뺨을 때리는 오늘 일에서 벗어나, 내일의 우리에게 맡기기로 하고 퇴근이나 하자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반만 행복했던 목요일이 가고 찌뿌둥하게 시작하는 금요일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던 팀장님은 역시 아무 말이 없었고 파트장님과 나는 회의실에 앉아 내려진 숙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도 우리 상황에 대한 빡침을 연대함으로써 하나가 되었다. 럭키 언럭키 연대를 오고 가는 동안 자주 까먹는 사실 하나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회사에서는 완벽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 반만 행복한 날도 감사해야 하며 그 반마저 회사와 연관이 없다는 것. 팀장을 내 손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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