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흑역사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고 하림은 일찍이 뇌리에 점처럼 박힐 문장을 노래로 새겼고, 나는 하림의 노래를 떠올리며 흑역사는 다른 흑역사로 잊힌다고 바보 같은 소릴 쓰려고 한다. 지난주에 BLS <Basic Life Support 심장과 폐의 활동이 멈춰 호흡이 정지되었을 때 실시하는 응급처치>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았다. 5시간 동안 교육에서 내가 얻은 건. 벌벌 떨리는 마음이 될지언정 <환자 상태 확인부터, 주변인들에게 정확한 구조요청 (사람을 지목하여 119 신고, 자동심장충격기 요청) 가슴압박 30회 후, 기도개방 인공호흡 2회를 구급 대원이 올 때까지 시행하는 것> 살면서 평생 목도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신청한 그 교육에서, 반복된 실습과 테스트를 병행하는 동안. 목소리 크고 우렁찬 사람들 사이에서, 내 목소리가 얼마나 작은지. 개미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지만, 아마 지나가는 개미가 보았다면 콧방귀 뀌었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물며 자동심장충격기를 요청할 때는 자꾸만 심장자동충격기라고 말하게 되는 것 하며, 자동심장충격기를 열어 패드를 부착할 때는 위치나 그림, 방향까지 눈에 보이는데도 눈앞이 하얘져 반대로 부착한다던가. 전원 버튼도 누르지 않고 콘센트를 꼽아. 어이없이 웃음바다를 만든다든가 하는 잦은 실수를 몇 번 하고 겨우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실제 상황도 아닌데, 테스트라는 늪에 빠져.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쿵쾅거려서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사실 이런 내가 불안해. 잊지 않으려고, 순서나 방법을 마음으로 복기하고 있다)
내 뒤에서 나의 실습을 관찰하던 동생은 "나는 언니가 아빠랑 같이 온 줄 알았잖아요."라며 어찌나 강사님께 의지하는지, 그가 뭔가를 답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어서 정답이라고 대답해 줘요! 하는 듯 조바심 난 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고. 연신 킥킥대며 웃었다. 나는 나의 흑역사가 너무나 강렬하여 차마 동생을 놀리지도 못하고 “너도 웃겼다. 내 상황이 이래서 그러니까,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라고 거의 울 듯한 눈으로 애원했다.
그 기억으로 한동안 마음은 울고. 헛웃음이 났는데, 얼마 전 회식에서 새로운 흑역사가 탄생했다. 며칠 전까지 나를 따라다녔던 BLS 버퍼링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회식에서 뽐낸 나의 진상 퍼포먼스가 생활 곳곳을 틈틈이 따라다니며 괴롭게 하고, 그런데도 다음 날은 또 다음을 살아야 하니까. 나를 놀리고 싶어 안달 난 눈과 입을 피해 몸을 사리다, 미처 피하지 못한 폭격 앞에선 고개를 떨구며 "미쳤던 거야. 그런 게 분명해 "를 되뇌며. 나는 누구보다 나의 새로운 흑역사를 기다리는 멍청이가 됐다.
잊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그게 다음 사랑이 아니라, 흑역사라는 것이 못내 씁쓸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