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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Nov 02. 2023

어쨌든, 여행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01


어깨에 ‘톡’ 다시 바닥을 향해 ’딱‘ 또르르 굴러가는 도토리를 보자 서둘러 익어버린 가을이 아쉽다면서 쪼그려 앉아 떨어진 도토리들이 모인 골짜기를 관찰했다. 모자를 채 벗지 못하고, 영글지 못한 채, 갈라진 틈새로 노란 속살을 드러내며, 세로줄 스트라이프가 진하거나 옅은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반복해도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었다. 밤사이 바람을 통과한 나뭇잎들이 발치에 나뒹구는 이 계절은 잘못 고른 복장 앞에서 겨울로 갔다가 봄으로 턴하여 한낮에는 여름으로 이를 때가 있으니 종잡을 수 없는 데다 형형색색 아름답기도 하여 넋 놓고 바라보다 이대로 모든 게 멈췄으면 좋겠다고 이뤄지지 않을 이 시간의 영원을 바랐다.


그런 날에 찾아오는 공허는 감정의 허기를 불러오기 마련이라 지난 여행의 기록을 꺼내보곤 했는데, 풍경만 가득한 사진 가운데 혼자를 키우겠다고 떠난 여행 속 뿌연 거울 속에 비친 포트레이트가 있었고 친구와의 맛있는 수다 여행의 기록들이 빼곡했기에 급하게 추억을 먹어 치워 쓰린 속을 잠재웠다.


당분간 여행 같은 건 없는 셈 치고 살겠다고 했지만, 일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자주 엉덩이를 들썩였고 애꿎은 현실을 탓했다.


내가 지나온 가을과 여행지는 모두 안녕할까?


계획에도 없던 여행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제주로 점프했다. 햇수로 4년째 지금의 집에 살면서 텃밭을 일군다는 기분으로 가꾸고, 솎아내고, 채우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했다. 첫 이사를 왔을 때부터 눈에 거슬렸던 큐빅이 사방 빼곡히 박힌 욕실 장과 거울, 모서리가 깨진 벽타일, 청소하기 힘든 타일과 타일 사이의 백색 매지, 그 매지를 긁고 채운 셀프 줄눈은 고생스러웠던 것에 비해 꼼꼼하지 못한 매무새 때문인지 청소할 때마다 하얀 줄눈이 떨어져 나왔다. 누가 언제 리모델링했는지 모를 욕실을 이제 더는 못 봐주겠단 생각이 들자 하루빨리 리모델링이 하고 싶었다. 소액으로 3년간 붓던 적금을 해지했고, 핀터레스트를 통해 레퍼런스를 수집했다. 레퍼런스와 타일 샘플을 보면 볼수록 내가 생각하는 욕실은 현실보다 이상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십 평대 아파트의 하나뿐인 욕실에 이상을 실현하는 일은 많은 돈과 품을 요구했고 몇 번의 어렵다는 거절, 왜 이렇게까지 욕실에 돈을 쓰려하냐는 물음, 게 중엔 이 정도면 쓸만한데 뭣 하려 공사를 하려 하냐는 견적을 보러 온 시공자의 말에 작은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많은 이상을 내려놓고서야) 시공업체를 정하고 (5일간 집을 비워줘야 했기에) 서울 골목 대장정이라도 할 요량으로 비즈니스호텔을 찾아보았지만, 공사 한 달 전임에도 나를 품어줄 방은 띄엄띄엄 옮겨 다녀야만 가능했기에 영역을 확장해 제법 여행 같아 보이는 부산으로 눈을 돌렸다. 구멍이 날 대로 난 텅장에 부담이 더해졌다. 잠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마저 겹쳐 잠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접었지만 출근길,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진 이파리를 주워 손바닥으로 쓱쓱, 툭툭 털어 책 사이에 끼워 넣다가 문득 한라산 생각이 간절했다.


코로나 거품이 어느 정도 사라진 제주는 부산보다 가까웠고, 여행비를 대충 따져봐도 숙소 컨디션을 낮추면 매력적인 장소였다. 게다가 가을이고 한라산이 있지 않은가? 운이 좋다면 상고대까지 기대할 수 있고 말이지, 그러나 상상할 때만 기분이 좋았고 한라산만 간다면 다른 어떤 것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무렵 오케이맨처럼 ‘다 된다’ 하던 인테리어 사장님과의 대화는 나를 수렁 앞으로 자주 데리고 갔다. 분명 타일 감기 젠다이를 하기로 했는데, 뜬금없이 대리석 상판을 얘기한다던가, 세면대, 양변기 모델을 알려드렸는데 다 준비됐다고 해놓고 세면대를 못 구했다고 갑자기 연락한다던가, 포인트 타일 얘기 방향등 크고 작은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이쯤 되니 여행은 사치 같고 틈틈이 공사 때 들러서 원하는 바를 주문을 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리모델링과 여행 사이에서 짧은 다리로 양다리를 걸쳐 버둥거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단거리 선수처럼 내게로 와 바통을 전달했고 찜찜한 기분으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잔금을 치른 후 가장 신나지 않은 채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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