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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Dec 23. 2023

어쨌든, 여행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03


맡겨둔 배낭을 찾아 두 번째 숙소로 향하는 걸음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체력을 완전히 소진했다는 압도적인 기분, 제주에 온 지 이틑 날이 되었지만 변변한 식사를 하지 못한 언짢음, 저릿한 발가락과 땀에 절어 있는 몸, 기침과 콧물이 동반된 열감기는 온전치 못한 마음과 몸의 상태를 만들었고 욕실 방수 문제에 신경까지 빼앗겨 도무지 기운이라는 것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완벽한 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옷만 준비해 간 터라 준비한 옷을 입으면 더워서 땀을 흘렸고, 벗으면 어느덧 한기가 드는 몸 상태는 거추장스러울 만큼 여행길에 방해가 되었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지도 몰라.


두 번째 숙소에 도착해 대충 배낭을 짚어 던진 후 식당을 찾아 나섰다. 끼니다운 첫끼니, 전복뚝배기 국물을 한 수저 뜬 후 후후 불어 입에 넣었을 때,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흘러든 녹진한 국물로 몸을 후끈하게 데우고 나서야 이런저런 생각도 몸의 상태도 한걸음 뒤로 물러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도, 콧물이 흘러도 모두 견딜만한 해졌다. 이래서 밥심으로 산다고들 하는가 보다. 뚝배기까지 먹어치울 기세로 야무지게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어치우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잘 먹었습니다.”를 하고 “또 오세요.”를 듣고는 천진하게 항구를 돌아 숙소를 향해 걸어왔고 아직 불이 켜진 약국에 들러 증상을 말하고 나긋한 목소리의 약사님으로부터 적당한 온도의 걱정의 말을 호주머니에 넣어왔다. 여행길이 쓸쓸해지면 꺼내 들어볼 요량으로.


클럽 마트에 들러 귤과 평소에는 마시지도 않는 오렌지 주스를 사며 (감기엔 비타민이지) 숙소에 돌아와서는 대충 짐을 정리하고 마찬가지로 씻은 후 기절한 듯 밤을 까먹고, 얇은 커튼 천 사이로 새로운 하루가 열릴 때까지 침대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오늘 일정은 독립서점 투어인데,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여도 뚜벅이 여행자로서 대부분은 텀이 길어 오지 않거나, 이미 떠나버린 버스에 망연자실하며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이거늘,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오뚝이처럼 일어서려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라산행의 피로는 온몸 구석구석에 들러붙어 생생한 붓기로 차올라 있었지만, 그런 것을 봐주었다간 오늘 서점 투어를 망할 것이 분명했기에 서둘러 씻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 같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숙소 주인이 문자로 추천해 준 가게의 물회를 먹기로 했다. 아이스 한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대로 버스에 오르면 오늘도 밥 없이 슬프고 고단한 하루가 될 것 같아서 맛있는 걸 먹으며 삶의 기쁨을 완성해 나가는 인간으로서 행복부터 그려 넣고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선한 종이-> 사슴책방-> 만춘서점-> 해지는 함덕해수욕장



투어라고 해놓고 겨우 세 곳밖에 가지 못했지만, 선한 종이에선 책이 아닌 서점 주인의 아버지가 만드셨다는 붓을 사 왔고, 사슴책방에선 역시 책이 아닌 일력과 아기자기한 아주 작은 새 그림이 그려진 마스킹테이프를 샀다. 책은 언제쯤 살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무거운 배낭을 몸이 기억했는지 몸을 사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만춘서점에서는 역시 길쭉한 달력에 눈길이 갔는데 (나이 먹는 건 지겹다면서 어째서 24년을 기다리는 인간처럼 자꾸만 달력에 눈이 가는 것인지) 아마도 판매수익금 모두를 우크라이나에 기부한다는 문구에 없던 인류애가 돋아났던 것인지도, 길쭉한 달력을 안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배낭에도 어깨에도 무리가 가지 않을 법한 소라가 그려진 손바닥만 한 책을 한 권 고르고, 이런 비슷한 게 집에 있지 하면서 고른 라이터와 만춘서점 볼펜세트를 골라 계산대로 가니, 만춘서점 7주년이라며 <문학동네시인선 001~199 시인의 말 모음집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시집을 선물로 주셨다. 여름 복숭아가 생각나는 책을 운 좋게 선물 받고 삼색고양이가 시간차를 두고 다가오던, 서향으로 물들던 만춘서점 뒤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장 버스를 타고 이동해 봤자 다음 목적지인 공항서점에는 갈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제주에 와서 버스를 타고 스치기만 했던 진짜 바다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곧장 함덕으로 발검음을 옮겼다. 철 지난 해수욕장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자니 삼삼오오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외로움이 밀려오고, 쓸려 내려가길 반복했다. 나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이런 걸 즐기는 나에게 진저리가 나기도 했다.


감기는 지긋했고, 산행의 여파는 여전했지만 만족할만한 하루를 만들었으니 허기진 배를 달래야겠는데 이제 곧 제주의 식당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문을 연 곳은 아점으로 먹은 물회가게뿐인 걸 보니, 여기가 소문난 맛집이라는 숙소 주인의 말이 참이었나 보다. 시간은 밤 9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뱃속에 넣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게 고른 메뉴가 전복죽이었는데 특별한 맛은 없었다. 오전에 서빙했던 외국인 노동자 청년이 밤까지도 일을 하고 있었는데, 눈썰미가 좋은지 계산을 하고 나갈 때, "아침에 여기 오셨던 분이죠?" 하길래 조금 쑥스럽게 "아아 네, 잘 먹었습니다." 하곤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구구절절 설명할 말도 없었지만, 어쩐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테트리스하듯 배낭에 차곡차곡 짐을 챙겨 넣고,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는 아쉬움을 한 줄 적지 못한 채 '용감한 형사들'의 사건 사고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졌다. 새벽같이 일어나 내가 이틀이나 묵었던 동네가 이렇게 생겼군 생각하며 아침으로 고기국수를 뚝딱 먹어치우고 공항에 짐캐리를 한 후 공항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에서 책을 사야 하는데 또 다른 것들에 홀려서 겨우 롤메모지 하나만 사는 것으로 내 안의 나와 타협하고 이번에도 손바닥만 한 책을 한 권 사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다.


또 연착된 비행기, 감기, 근육통, 비행기 고도가 올라갈수록 터질 것 같은 귀... 그런 것들이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었지만, 현실로 돌아가야 할 내게는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으로 몸의 아픔쯤은 잊고 싶었다.


컨디션이 좋았다면,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걱정이 없었다면. 박진감 넘치게 걷고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먹어치우는 시간까지 꼼꼼하게 챙겼을 테고 더 많이 담고 싶어서 카메라를 한 번 더 꺼내 들었을 텐데. 버스를 타고서도 빈틈없이 쫓았을 제주에 빠져들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아쉬움이 다음 그다음의 통로가 되어 준다면 좋겠다. 통장잔고보다 대출금이 더 많지만, 여행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면 좋겠다. 그런 마음들을 품고 제주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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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빈틈 많은 여행이었음을 인정하듯 필름 두 롤과, 사슴서점에서 샀던 아주 작은 마스킹 테이프가 감쪽같이 사라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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