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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Mar 06. 2023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병을 얻었다

열심히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

회사를 다니다 보면 열심히 일하다 간혹 병을 얻게 되는 경우들을 본다. 사실 그 사람들이 회사를 안 다니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면 평생 그 병을 얻지 않았을까는 의문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인과관계가 증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기에는 사실 일을 과하게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업무 환경적인 부분을 분명히 간과할 수 없긴 했다. 내가 신입일 때 뵈었던 어떤 열정적인 차장님은 넉살 좋기로 유명했는데, 한때 카리스마 넘치게 워커홀릭으로 중요한 업무를 전담하시다가 암에 걸려 병가를 쓰고 돌아오신 후에 스타일이 완전히 바뀐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나의 첫 팀장님은 그룹사를 통틀어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는데 본인의 특기를 살려 십수 년을 쉬지 않고 술 접대로 영업 실적을 화려하게 올리시다 어느 순간 위에 구멍이 심하게 나서 술은커녕 밥도 못 드시고 한 달 만에 수십 킬로가 빠진 것도 보았었다. 나 역시 사회생활 초년 때부터 잦은 야근으로 어깨 목 등의 물리치료와 침 치료 등이 끊이지 않았지만, 절대로 저분들처럼 중병 얻을 정도로 버닝 하지는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일할 시간, 그리고 나를 돌볼 시간


“이건 지금 망막에 구멍이 난 거예요. 지금 당장 조치하지 않는다면 망막 전체가 탈락되어 언제 실명되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에도 화상회의 콜을 떠나지 않고 한쪽 귀로 이어폰을 꽂고 있는 채였다. “네?? 이게 그 정도로 심각한 거라고요? “ 나는 내가 한쪽 귀로 반만 듣고 있어서 제대로 못 들은 거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의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몇 년 전에 여의도 성모병원에 있을 때 딱 비슷한 케이스를 봤어요. 증권사 직원이었는데 오후 5시쯤 똑같은 상황에서 왔길래 당장 레이저로 시술을 해야 한다고 해도 6시에 너무 중요한 클라이언트 발표가 있어서 안된다고 그냥 그대로 돌아갔죠. 그러고 어떻게 된 줄 아세요? 새벽 3시에 응급실로 바로 실려왔죠. 그나마 빨리 와서 시신경을 70프로 정도는 살릴 수 있었는데, 시신경이란 한번 죽으면 되살릴 수 없는 거예요. “ 등골이 오싹했다. 난 그 정도까지 무리한 것 같지 않은데 이렇게 쉽게 실명될 수도 있다고?


직전까지 나의 스케줄은 만만치 않긴 했다. 매일 아침 8시는 글로벌 부사장이, 매일 오후 5시는 코리아 사장이 포함된 미팅 콜들이 근 한 달째 잡혀있었다. (나 혼자만은 아니고 각 조직의 대표 리더들이 전부 초대된 수십 명 규모의 회의였지만, 돌아가면서 매번 현황을 업데이트하는 구조였다.) 그날 오전 8시 현황 공유된 이후의 업데이트를 오후 5시에 다시 공유하고, 오후 5시부터 공유된 상황 이후의 업데이트를 다음날 아침 8시에 다시 공유해야 하는 일정이 무한 반복되었다. 이 순환 고리에서 빵구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 업무 시간 이후에 발생한 다음날 아침 업데이트를 위해 새벽 두세 시쯤 계속 간밤에 미국에서 발생한 상황들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갓 두 살짜리 아기와 같이 자는 나는 안 그래도 예민한 애가 깰까 소리 죽여 어두운 화장실에 몰래 나와서 이메일들을 확인하고 몇 개만 답장을 해도 두세 시간씩 훌쩍 지남을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계속 한쪽 눈에 반달과 같은 잔상이 남는 것 같았다. 안과를 갈 시간이 없어서 몇 주 버티다 그나마 소규모 회의를 하면서 이동해서 간 길이었다.


우리는 그 “정도”를 결코 알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밤낮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았었다. 벌써 만 2년째 통잠을 자지 않은 아기와 함께 생활하면서 새벽에 깨는 것이 이미 생활화된 것도 있고, 아침저녁으로 하는 회의의 분위기 역시 각 조직의 리더들을 닦달하려는 목적이나 혼내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현황을 타이트하고 투명하게 공유하면서 윗선에서는 더 도와줄 부분이 없는지, 다 같이 논의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으면 함께 타계해 나가자는 취지였기 때문에 불필요한 스트레스나 압박감에 시달리기보다는, 그냥 한국과 미국의 두 타임존에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현황을 챙겨야 한다는 수준의 정보의 빈도와 양이 많다는 것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면서 공부를 좀 많이 하거나 일을 좀 많이 하는 때도 있을 수 있지,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니고서야 단순 사무직을 하면서 몸이 크게 상할 일이 있을까 싶었다.


나의 사례를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니, 의외로 나처럼 그냥 일 좀 많은 사무직 생활만으로도(?)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병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다. 나와 같은 망막 박리 현상의 심화 버전으로 아마존 미국 본사에서 일하던 기간에 정말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사람도 만났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서 나와 비슷한 스케줄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던 다른 팀 리더는 눈이 아닌 위에 구멍이 나서 수술을 하느라 이 주간의 병가를 다녀왔다는 사실도 뒤늦게 들었고, 전년도에 비슷하게 중요한 글로벌 프로젝트를 감당했던 옆팀 리더는 궤양성 장염이라는 난치병을 얻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배가 아팠지만 8개월 동안 정말 병원 한번 갈 시간을 빼기가 어려워 프로젝트가 다 끝나고 병원을 갔더니 생각지도 못한 병명을 들었더란다. 나를 포함한 이 모든 사람들 중 목숨 걸고 성공에만 돌진한 워커홀릭 스타일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가정과 아이가 있는 평범하고도 책임감 있는 모범생 스타일일 뿐이었다.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 그 바퀴의 톱니들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 잔상이 그렇게 심각할 수 있는 안과 질환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었고, 별도로 안과 갈 시간을 뺄 수도 없었던 당시의 스케줄을 생각해 본다. 글로벌 성공 기업들이 얼마나 중요한 과업들을 촘촘하게 수행하는지와도 직결된 문제였다. 이미 본사와 한국 오피스의 수많은 팀의 사람들이 다 참석하기로 되어있는 미팅 콜들이 빡빡하게 예정되어 있었고, 수많은 관련 팀에서 각각의 어젠다로 몇 주 치 콜을 개별적으로 보내놓은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아닌 반나절만이라도 일정을 빼려면 관련된 그 모든 사람들에게 양해를 일일이 구하고 그들이 다 맞는 시간으로 다시 옮겨야 하는데, 이미 다른 스케줄들이 빼곡히 차 있고 매 건의 데드라인이 줄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조정의 틈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냥 한 사람의 상사에게 허락받고 반나절 휴가를 다녀오는 것으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내 밑의 팀원들도 이미 하나둘씩 병이 나기 시작할 정도여서 더 이상 위임을 할 여지도 없었다. 거대한 회사의 촘촘한 시스템의 바퀴에서 한 조각의 톱니들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만일 하나의 타임존으로만 일하는 국내 기업이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내가 맨 처음에 언급했던 사례들은 우리나라 대기업이었고, 나는 그 기업의 인력 개발원에 교육을 받으러 가서는 몇 달 전에 이루어진 임원 교육 세션에서 어떤 신임 임원이 야간 과제를 수행하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이후 연수원 과제의 양이 현격히 줄어들게 되었다는 괴담도 들었다. 그렇다, 어디든 밥 벌어먹고 다니기 정말 힘든 세상이다. 그렇다고 자영업을 하면 내 삶의 컨트롤이 더 가능하고 병 날일이 없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매일매일 생존이 자기 손안에 달려있는데, 휴가라고 마음껏 쉴 여유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사전에서나 볼법한 단어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정말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직장을 다니는 것, 그러고도 계속 큰 병나지 않고 건강히 생활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어딘가 병이 날지도 모른다. 사실 일이 아닌 그 무엇이라도 너무 과하게 하면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 병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상대적으로 약하게 타고난 부분들이 있을 텐데 아마 그쪽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골골대던 사람들은 본인이 어디가 안 좋은 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또 그만큼 면밀히 주시하므로 더 오래 산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운 좋게 건강 체질로 에너지 넘치게 살던 사람은 어디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가 꼭 어디가 제대로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예를 들어 대상포진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서야 그동안 스트레스와 피로가 누적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식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큼 열심히 내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결국 나를 돌봐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용맹하게 전장은 나서되 이기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상흔이 없도록 하는 것에 더 집중을 하도록 하자. 일은 늘 금방 끝이 있지만 나의 몸은 끝까지 내가 가져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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