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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Nov 02. 2023

세 번째 직장, 2주년을 맞이한 회고

111 그날을 기억하며

오늘이 11월 1일이라니.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기념하고 싶어서 굳이 고집했던 그날. 같은 숫자를 세 개 맞추기 위해서, 굳이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그전 주 금요일 퇴사를 하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바로 오는 월요일에 출근을 하겠다고 자청했었다. 심지어 기억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건만, 1주년 당시에는 망막에 구멍이 날 정도로 연속해서 밤새운 나날들의 지속으로 기념은커녕 기억도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2년이라는 시간이 무상할 정도의 특급 열차, 아니 제트기라도 타고 날아온 기분이다.


너무도 짧았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속도였지만 돌아보면 그 어떤 이 년 보다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내게는 정말 많은 것들이 처음 있는 일들이었다. 1) 경쟁 치열한 최종 소비재 마케팅을 경험하게 된 것도, 2) 더 이상 한국 대기업이 아닌 전형적인 미국 대기업에서 일하게 된 것도 있었고, 3) 공식적인 리더의 자리에서 조직을 이끌며 조직 규모를 두 배 확장하면서 4) 역대급 전사 프로젝트 리딩까지 동시에 직접 해본 것 역시 엄청난 변화였다. 더불어, 5) 내가 워킹맘인 채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된 것 역시 인생 첫 경험이었다. 나 역시 이직이라는 결단을 하던 당시, 이 모든 변화들을 동시에 내가 과연 무탈하게 다 소화할 수 있을까에 의심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겐 분명히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훨씬 컸고, 실제로 여태껏 커리어 여정 중에 가장 큰 보상의 기록까지 이제는 추가하게 되었다. 누군가도 비슷하게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나도 했으니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남을 격려해 주기 전에 어쩌면 나 자신을 격려해 주는 것부터 먼저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아침 8시 미국 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까지 종일 회의 시간으로 가득 차고, 점심조차 제대로 못 먹고 일하거나 이동하기 바쁘고, 회의와 동시에 각종 전략적인 고민과 멋들어진 자료 역시 만들어야 하니 정말 몸을 쪼개고 쪼개도 모자랄 지경이다. 태생적으로 멀티 태스킹을 잘 못하고, 종종 성급해지며, 30대 중반 이전에 영어권 국가 한 번 나가보거나 딱히 조기 교육을 받아보지도 못한 내가 자괴감 드는 일들은 여전히 매일 어디선가 끊임없이 자꾸 튀어나온다. 너무도 좋은 회사임에는 분명한데, 역대급으로 같이 일하기 어려운 상황도 너무나 많이 발생하며, 분명히 겉으로는 화를 내고 있지는 않으나 속으로는 부글거리고 부당하고 억울한 것 같은 상황도 계속 마주하는 것이 직장 생활의 묘미랄까. 그래도 나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셀프 토닥 한 번은 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엄청나게 많은 경험을 했잖아?


그래, 결과보다도 경험 자체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나는 "어떤 일이든 결국 좋은 경험이었던 것으로"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재주라는 것이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회사는 아마도 내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회사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몇 가지 포인트들이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 꼽아보자면, 1) 조직 문화가 건전하여 리더들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있고, 실제로 본받고 싶은 리더들도 많은 편이고, 완벽하지 않은 리더라도 한 두 개 이상은 꼭 본받고 싶은 포인트가 있다. 2) 몹시 민주적이어서 말단 계약직 사원까지도 본인의 업무에 있어서는 완벽한 오너십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점이 개개인에게 커다란 동기부여가 된다. (권위와 상명하복을 즐기는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매우 안 좋은 회사일 수 있다..) 3) 실리적인 문화로 불필요한 프로세스가 거의 없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다. 차라리 일을 많이 주지, 출퇴근 시간을 관리하지도 않고(실제로 관리할 필요가 없이 업무 자체가 많긴 하다), 집에서건 사무실에서건 본인이 맡은 일을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 건건이 결재를 받아야 하는 일은 정말 적다.


당연히 좋은 점만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뼈아픈 피드백을 받아보기도 했고, 굳이 이곳에 풀지 못하는 에피소드 역시 꽤 있다. 하지만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는, 리더가 되면서 점점 더 말을 아껴야 하고, 건건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며, 더 많이 다듬고 정제한 메시지를 세상에 내보내야 한다는 부분이다. 솔직함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던 사람으로서 이 부분은 정말 어렵기도 하고, 오래 묵은듯한 인생 숙제를 40줄 되어서야 이제 뒤늦게 시작하려니 스스로 계속 부끄럽기도 한 부분이다. 그래도 돈 내고 배움을 사던 학교를 졸업한 이래, 돈을 받고 배움을 주는 곳이 어디 있냐며 늘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노력한다. 나의 보스뿐 아니라 팀원들에게도 배울 점이 정말 많은 나는, 역시 또 인복 하나는 타고났다며 다시 한번 감탄해 본다. 그래, 참으로 감사한 이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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