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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Feb 05. 2024

운수 좋은 날

<현진건 중단편선>/현진건/문학과지성사

그러니까,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운수가 좋았던 날도 오늘 같은 날씨였나 보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143쪽) 누구나 살다 보면 유독 운수가 좋은 날이 혹은 운수가 좋다고 느끼는 날이 있을 것이다. 시험 볼 때 답을 모르는 문제의 정답을 찍어서 맞힌다거나, 애타게 찾고 있던 절판된 책을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발견하게 된다거나, 까다로워 보이는 의뢰인이 의외로 손쉽게 수임계약을 체결한다거나, 패색이 짙은 소송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승소 판결을 받는 일 등이 있으면, 오 오늘 운수가 좋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린다.


어렸을 때 운이 좋은 일이 생기면 멋모르고 마냥 좋아했지만, 이제는 작은 운도 마음 편히 즐기기는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행운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연은 항상 균형을 잡으려 할 테니, 내 행운이 언젠가는 불운으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잇단 행운에 의아해하던 김첨지는 "한 걸음 두 걸음 집이 가까워갈수록 그의 마음조차 괴상하게 누그러웠다. 그런데 그 누그러움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을 빈틈없이 알게 될 때가 박두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151쪽)


다른 한편 마음 편히 행운을 즐기는 태도는 오만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고,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래서 신의 진노를 불러올 것 같아 두렵다. 내가 행운을 누리는 그 시간에 누군가는 불운에 신음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운 좋은 일에 대해서 겸손해지자고 마음먹게 된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나쁜 일이 생기면 이제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위안한다.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도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운이 좋아서 생긴 경우가 많다. 좋지 않은 일도 사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운이 나빠서 생긴 일인 경우도 많다. 그러니 자부할 것도, 위축될 것도 없다. 운 앞에 겸손해진다.


아내는, 어렸을 때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면 슬펐는데, 이제는 무섭다고 한다. 우리는 <운수 좋은 날>이 소설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돈 때문에 더러운 일을 당하고 모욕감을 느껴 "봐라 봐!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돈이 없나. 다리 뼉다구를 꺾어놓을 놈들 같으니."(154쪽), "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154쪽)이라고 외치고 싶은 김첨지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첨지들이여, 그의 가족들이여, 조금 돈을 벌었다면, 그 순간이라도 조금 마음 편히 설렁탕 한 그릇 정도는 먹도록 하자.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159쪽) 이런 일은, 정말이지, 너무, 너무 슬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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