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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Jan 16. 2024

퇴원

<이청준 전집1 병신과 머저리>/이청준/문학과지성사>

'나'는 위궤양을 앓고 있는 환자다. 지금 의사 친구 '준'의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위궤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준'도 병원의 윤간호사도 알고 있다. 셋이서 따로따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알면서 모르는 체하고 있는 것이다. 


윤간호사는 '나'의 병명을 자아망실증으로 진단한다. '나'는 병원 침상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계탑 같은 상태다. 고장 난 시계탑이다. 윤간호사는 '나'에게 거울을 빌려준다. "거울을 들여다보노라면 잃어진 자기가 망각 속에서 살아날 때가 있거든요." 사람들이 시계탑의 바늘을 교체한다. 시계가 다시 움직인다. 윤간호사가 '나'에게 말한다. "선생님 마음에도 바늘을 꽂아보세요. 그럴 힘이 있을 거예요, 선생님에게는."


'나'에게는 억압당한 욕망이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와 누나들의 속옷을 몰래 가져다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 깊이 잠들었고, 그 모습을 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틀간 밥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 모든 욕구는 "언어가 허용될 수 있는 한계 이전의 것이었다." 욕구는 언어라는 그물망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언어가 완전히 소멸된 그 자리에 "슬프도록 강한 행동의 욕망과 향수만이 꿈틀"거린다. 언어로 구조화된 질서 속으로 욕망이 편입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사회 속으로 돌아올 수 없다. 퇴원을 하는 '나'에게 윤간호사는 말한다. "다시 돌아오시겠죠?"

 



"잘 알다시피 <퇴원>은 이청준의 등단작이지만, 이 작품은 우선 그 인물과 행위의 모호함이라는 주제, 그리고 형식 면에 있어서는 서사 구조의 중층성이라는 이청준적 특질을 단번에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등단작이라는 의미 이상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권오룡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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