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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Jan 10. 2023

토끼처럼 드세요



병원만 다녀오면 술약속 잡고 야식 먹는 남편이지만 병원 가기 전에는 검사결과로 혼날까 자중하는 편이다. 일단 술은 2주 전부터 마시지 않는다. 야식은 하면서 몸무게는 변명을 위해 꾸준히 확인한다. 나름 철저한 관리(?) 중인 건가. 살이 문제라 저녁은 샐러드를 먹지만 금방 찾아드는 허기에 하이에나처럼 먹을 것을 찾는다. 과자도 좀 먹고 고구마도 좀 먹고.. 그나마 주 4일을 지키면 다행이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날이 추워지니 몸이 더 움츠러들어 운동은 안 하려고 한다. 하루종일 일하고 들어와 다시 나가려면 얼마나 귀찮은지 알기에 잔소리를 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제는 단순히 비만이 문제가 아닌 건강과 직결된 문제라 ‘운동하자, 야식 먹으면 안 된다’ 한 소리 할라치면 첫마디에는 슬쩍 미소를, 두 마디에는 성질을 낸다. 몇 번 반복되니 이제 나도 말하기가 싫다.



병원 가는 날, 우리의 루틴은 늘 똑같다. 예약시간이 몇 시건 상관없이 8시 전에 출발, 병원에 도착해 피검사를 하고 아침 먹는다. 이곳의 예약 시스템은 검사 결과가 먼저 나오는 사람을 당겨 진료하기 때문에 서둘러 검사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 보통 아침을 먹고 오면 30분 안쪽으로 진료 순서가 된다. 코로나 이후 병원 근처에 아침식사가 되는 음식점이 거의 없어 이삭 토스트를 먹거나 압구정 김밥에서 라면을 먹는데 두 달에 한 번 먹는 건데도 요즘은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어찌 배를 채우고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잘 지냈어요?”

늘 똑같은 질문으로 인사하시는 의사 선생님.

두 달에 한 번 보는 환자를(물론 10년 넘게 보고 계시긴 하지만) 얼마나 기억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에 그다지 서운 치는 않다.

“주사는 잘 맞고요?”

“몸은 좀 어때요?”

이쯤 되면 로봇인가 싶기도.. ^^

여기까지는 거의 Ctrl V, Ctrl C 같은 질문.

피검사 결과지가 오픈되면서부터 의사 선생님의 추궁과 남편의 변명타임이 시작된다.

“간 수치가 문제네. 당뇨도 있고..”

”이건 딱 봐도 뱃살이 문제야. 내가 만져봐? 안 만져봐도 뱃살이 쪘을 걸? “

겨울이라 두툼한 옷을 입은 탓에 볼록 나온 배를 조금 감춘 남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몸무게는 그대로인데..”

“몸무게가 문제가 아니라 뱃살이 문제야. 팔다리 살이 빠지고 뱃살이 찐다니까. 뱃살 빼야 돼. 뱃살만 빼면 이거 다 좋아져.”

“네.”

대답은 찰떡같이 하지만 소귀에 경읽기라는 걸 나도 남편도 의사 선생님도 안다.

“저녁에 샐러드를 먹기는 하는데 당뇨도 먹을 수 없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

궁색한 변명을 하는 남편. 그렇게 가려먹지도 않으면서..

“그래? 그럼 두 달 동안 나는 토끼다. 생각하고 풀만 먹어. 토끼 알지? 토끼는 풀만 먹잖아. “

그때였다. 내 입에서 진지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저기 선생님.. 토끼도 고기 먹는데요. 토끼 잡식성.”

의사 선생님의 말에 토를 단다거나 남편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면 남편은 분명 저렇게 나한테 말할 테니 미리 입막음을 하고 싶었을 뿐. 그래도 나보단 의사 선생님 말은 좀 더 진지하게 듣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자 좀 전까지 풀이 죽어있던 남편은 웃음이 터졌고 열심히 토끼처럼 풀만 먹으라고 외치던 의사 선생님은 할 말을 잃으셨다.

“토끼가 풀만 먹고 순해 보여도 성격이 지랄 같아요. 제가 키워봐서 아는데 개네들 절대 순하지 않아요.”

역시 나는 남편에게 토끼처럼 풀만 줄 경우 성격이 지랄 같아진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먹고 싶은 걸 못 먹을 시 남편이 얼마나 예민하고 사나워지는지,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그러니 의사 선생님이 내 편을 좀 들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표현이 의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내 말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이러면 남편 병 못 고쳐요. 부인이 남편맘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돼요. 부인이 문제네.”

좀 전까지 나를 바라보며 남편을 혼내던 의사 선생님이 이제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를 혼내고 계셨다. ‘마치 내 편 좀 들어줘하듯이..’

아니.. 저기.. 그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아휴..

다음번 방문 때는 토끼처럼 먹고 뱃살을 뺄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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