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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Jan 20. 2023

38일 차 : 공주님 머슴밥 드신다

이가 성장발달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생후 20일 차 정도였다. 밥을 먹고 트림을 시키려고 가슴에 안고 등을 두드리는데 혼자서 목을 이리저리 가누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팔로 내 가슴을 밀면서 고개를 드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땅에 내려두고 터미타임을 시켜볼까 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마침 한 전문의가 터미타임은 조금씩이라도 신생아 시절부터 시켜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때가 한 24일 차 정도 되었는데, 아기가 혼자서 고개를 들더니 왼쪽을 보던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와이프를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와이프도 눈이 엄청나게 커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아무리 뱃속에서 오래 있다가 나왔다고는 해도 이렇게 힘이 셀 수가 있었던가. 게다가 침대에 눕혀두면 소위 나이키 자세를 취하는데, 등을 거의 바닥에서 떼고 옆으로 돌아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비틀면 뒤집기인데... 뭔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나는 사실 자전거를 타기 이전에는 운동에 그렇게 소질이 없었고, 근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등산을 많이 해서(학교가 산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체력은 있었지만, 근력과는 거리가 먼 유산소 위주의 체력이었다. 부모님께 여쭤보니 나는 걷는 것도 느리고, 어릴 때부터 뭔가 운동 체질은 아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럼 지금 이 남다른 운동신경은 와이프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다. 자전거를 탈 때도 그렇고 헬스를 할 때도 와이프는 근력이 남달랐다. 그것이 우리 딸에게 전달된 것이다.


아빠의 길이와 엄마의 근력이 조합된 것이라면, 한 번 해볼 만한 게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프도 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아니더라도 평생을 즐길 수 있는 운동을 취미로 갖는 것에는 대 찬성이었고, 이왕이면 악기처럼 수준급 실력을 갖추는 것이 인생을 보다 다채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의 운동 종목 결정 토론은 쓸데없이 진지하게 흘러갔다. 부모는 결국 팔불출이 된다는 말을 생후 20일 차에 그대로 따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어이가 없다.


아무튼 나름 진지하게 고민한 것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수영이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이기도 하고, 생존 수영처럼 꼭 배울 필요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빠도 수영을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많았기에 대찬성이었다. 여기에 아빠의 로망인 같이 자전거 타기를 추가하였고, 더불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복싱까지를 추가하였다. 복싱은 호신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길거리에서 복싱보다 강력한 기술은 없기 때문이다. 유도고 주짓수고 간에 기술을 걸려고 다가오는 순간에 턱을 맞고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다.


점점 글이 개그로 승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아이의 성장발달을 지켜보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엄청난 식성을 보여주면서 의사의 분유량 권고 따위는 가볍게 넘어버리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먹는 아기를 보면서 와이프가 한 마디를 던졌다. "우리 공주님이 머슴밥을 드시네^^;;" 딸은 그 말의 의미도 모른 채 분유를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고 나는 너무 웃겨서 한참을 포복절도했다.


아무튼 많이 먹으니 체중이 많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어날 때 백분위로 50에서 60 사이었던 체중은 어느덧 90이 되었고, 신장은 97 정도를 유지했다. 사람들이 말하던 자이언트 베이비가 된 것이다. 체중 5kg이 넘으면 하루에 5천 원씩 이모님 비용에 할증이 붙는다고 하는데, 이모님이 이 사실을 모르시기만 바랄 수밖에.(농담) 하여간 평생을 비쩍 마른 것이 콤플렉스이자 스트레스였던 나인지라 이 사실이 그렇게 나쁘거나 걱정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너무 어린 시절에 체중이 크게 증가하면 지방세포로 인해 커서도 체중 조절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하니 적정한 범위에서 조절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키가 커서 불편한 것도 있긴 한데, 아무래도 여자 아이다 보니 절대적인 키로 인해서 불편한 경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것보다는 당장 기저귀 갈이대가 작아서 발이 자꾸 밖으로 나오는 것과, 물려받은 옷들이 작아서 단추가 잘 안 잠기는 것이 더 불편하다. 개인적인 바람이면 170 초반 정도가 딱 좋을 것 같다. 코트 입었을 때 길이감도 적당하고, 복싱에서 필수적인 팔 길이인 리치도 어느 정도 확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글은 개그로 마무리된다. 뭐가 됐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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