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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Apr 17. 2023

바지 직구하고 감동받아 바지적삼 다 적신 이야기

큰 키와 큰 키에 비해서도 긴 다리를 가지고 태어난 덕분에, 현재의 신체 사이즈가 완성된 이후로 몸에 맞는 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다. 겨울에는 발목이 늘 시렸고,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손으로 바지를 잡아 내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일부 브랜드에서 기장을 별도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입어보고 기장이 조금 긴 바지가 있으면 색상이고 디자인이고 볼 것도 없이 바로 구매를 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기장이 길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라서 여전히 나에겐 짧디 짧은 바지였다. 그러던 중에 한 청바지 매장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해외 유명 청바지 매장에서는 허리와 기장을 병기해서 판매하고 있는데, 국내에는 기장이 32인치 보다 큰 바지가 수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장 32인치 이상은 허리 34인치 이상만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럼 반대로 말하면 해외에서는 34인치 이상의 청바지가 있다는 것이고, 또 허리가 30이나 32인치 이면서도 기장이 32인치가 넘는 청바지가 있다는 것인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아마존에 들어가서 남성용 바지를 검색하니 모든 허리 사이즈와 모든 기장이 다 조합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허리 28인치에 기장 34인치 같은 변태적인 사이즈도 선택이 가능했던 것이다. 평균 신장이 큰 해외에서는 기장이 긴 바지가 나올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은 했지만, 허리와 기장이 비례해서 커지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 바지 사이즈라는 것은 허리와 기장이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나름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내가 골랐던 바지들은 대부분 허리 32인치에 기장 30인 바지들이었고, 개중에 허리 32에 기장이 32인치인 바지들이 종종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하나하나 입어보다가 조금 길다 싶으면 바로 구매를 했던 것이다. 이제야 바지 사이즈의 비밀을 알게 되다니. 흥분한 마음으로 바로 시범 구매를 해봤다. 2인치 단위로만 나와서 불편했던 허리는 꼭 맞는 31인치로 고르고, 기장은 34인치를 선택했다. 그렇게 4벌을 고르니 배송료까지 18만 원 정도가 나왔다. 국내 여느 SPA 브랜드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가격까지 만족스러웠다.


배송은 1주일. 실제로 입어보니 너무 잘 맞았다. 발 뒤꿈치를 적당히 덮는 기장의 바지라니. 이런 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감동적이었다. 허리도 생각보다 넉넉해서 다음엔 30인치를 주문해도 될 것 같았다. 살면서 가장 불편했던 문제가 일 순간에 해결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기성복의 기준에서 늘 특이한 신체라고 생각했는데,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으니 내가 그렇게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은 기분마저 들었다. 바지 하나에 뭔 그렇게 난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 평생의 소원이 단돈 4만 5천 원에 해결된 기분이었다.


요 며칠 잘 입고 다니면서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국내의 바지 사이즈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허리도 2인치 단위로만 선택해야 하고, 기장은 선택권도 없다. 허리가 32인치에서 36인치로 늘어나도 기장은 계속 30인치다. 소비자들은 내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성복 제작사가 만든 옷에 몸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에 비해서 미국 쇼핑 사이트에서 구매한 옷은 정 반대였다. 1인치 단위로 내가 허리와 기장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다. 제작사의 사이즈가 아니라 내 몸에 맞춰서 옷을 고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단돈 4만 원에 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아무래도 미국엔 신체 사이즈가 큰 사람이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허리와 기장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소비자의 다양성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소비자들을 존중하는 것이 시장에서의 주요한 전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개성보다는 집단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한국 사회에서는 현재의 사이즈 분류로도 충분히 소비자들을 대응할 수 있다고 제조사들이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언젠가 국내 소비자들의 다양성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어차피 다 기계로 찍어내는 바지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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