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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Feb 14. 2024

#8. 여기가 끝인가 보네

-지호의 이야기 8

선우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지호. 그녀의 차갑게 날 선 음성이 이어졌다.


“도망 안 가면. 피하지 않으면. 그래서 맨날 네 꼴이 보고 싶어 죽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선우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같이, 살자.“


픽. 지호의 입에서 실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렀다. 또 그 소리다. 살자는 소리. 그것도 같이. 지호가 선우에게 잡힌 턱을 빼며 말했다.


“미친..“

“왜. 같이 살잔 게 뭐. 죽지 못해 사는 거 말고 진짜 살아보자고 너랑 나. 그리고 너 나 아직 못 놨잖아. 그래서 이꼴로 사는 거고. 타락한 서지호.“

“(픽) 별.. 참나..“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그러면서도 내심 제대로 정곡을 찔렸음에 지호가 실소를 터뜨렸다. 얼음장 같은 그녀를 보며 아랑곳 하지 않고 선우가 빙글 웃었다. 태선우가 드디어 미쳤다고, 지호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서지호,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들려줄 태선우는 더 최악이야.“

“하지마. 안 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지호를 가만히 붙드는 선우의 눈동자.


“궁금하지 않아? 네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 태선우 말고, 또다른 태선우 이야기.”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지호는 곧바로 직감했다. 이번에도 졌다고. 태선우한테.

“보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으려나..”


언젠가 이영이 가리킨 주방 창 너머의 시커먼 산으로, 선우의 시선이 닿았다.


“아. 서지호 말이 맞았단 것부터 하면 되려나? 태선우는 가문, 의사 명패 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란 거.“


선우가 지호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맞닿았다.


“대대로 의사 명문가... 사실 댁의 아드님이요, 이 명문가 명패 떼고, 의사 딱지 떼고 나면 참 별 볼 일 없는 남자에요. 어디 내놓아도 제가 아깝다, 이런 말입니다.“


그날, 지호가 미현을 향해 던진 말이었다.

선우가 다시 덤덤한 얼굴로 어느 일상 속 한 부분을 풀어놓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면.. 어째서 나는 어머니 말 한마디에 서지호를 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혹은.. 그래서 결혼은 어떻게 박살을 냈는지, 음..“


뭐 하나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저 스쳐지나는 언어들처럼 늘어놓는 선우. 뭔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그를 보며 지호는 더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를 묵직한 통증이 그녀의 심장께를 눌러왔기 때문이었다.


“뭐가 많아서 생각보다 어렵네. 아! 천애 고아가 의사 집안을 만난 이야기..! 그래, 여기가 좋겠다.“


천애 고아라고? 누가? 설마. 태선우가? 지호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잠재우는 동안, 이영이 주방 창을 열고 아직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봄밤의 향기를 첫차 안으로 들였다. 이영은 봄밤을 흠뻑 들이키며 주방 한 쪽에 얌전히 놓인 쿠션 의자에 가만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선우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12살 여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억수 같이 비가 퍼붓는 날이었다. 왜 ‘하필’ 그날이었는지, 혹은 꼭 ‘그날이어야만’ 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선우는 이런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냥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날이었다고.

창가에 서서 세차게 퍼붓는 비를 보고 있자니 언젠가 아빠와 함께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고래가 생각났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고래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집은 있을까. 비가 오는 바다 속은 어떤 온도일까. 그러다 문득, 고래를 보러가자고.


“고래 보고 싶어.”


선우의 뜬금없는 소리에 빨래를 개키던 선우의 엄마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박선우, 오늘은 떼 써도 안 돼.”


자신의 아들은 한번 꽂히는 일에 포기할 줄 모르는 성정이었으므로. 그러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그것‘을 손에 쥐고야 마니.. 단도리를 쳐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 아빠에게 매달리기 시작한 선우.


“아빠아--- 아들 고래 보고 싶어. 응?”


따듯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선우의 아빠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위험해. 기다렸다가 비가 좀 잦아졌을 때 나가는 건 어때?“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 못한 선우모가 부자에게 못을 박듯, 조금 전보다 더 단단한 목소리로 일렀다.


“당신, 못 지킬 약속 하지 마요. 그리고 박선우, 오늘 폭우주의보야. 다른 날 가.”

“아니---! 아빠가 비 좀 잦아지면 나가자고 했어! 그치 아빠?”


포기할 줄 모르는 선우의 ‘떼 부리기’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되면 부부에게 방법은 없다. 선우의 장단에 맞춰주는 수밖에.

그리고 몇 시간 뒤. 거짓말처럼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30분마다 비 상황을 체크하던 선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빠! 엄마! 비 그쳤어!! 빨리 빨리! 고래 보러 가자!!“


세 식구는 그렇게 어느 지방의 돔수족관에만 있다는 향고래를 보러 향했다.

*

*

그 시각. 선우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한 남자 아이도 식구들과 할아버지의 추도식 장소로 출발했다.

검은 세단 두 대가 나란히 달리고 있는 도로 위. 앞의 세단에는 선재(미현의 큰 아들)과 선우(미현의 둘째 아들)이, 뒤의 세단에는 미현과 우식(미현의 남편)이 타고 있었다. 두 대의 차 내부는 숨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비가 퍼부어댔다. 비상등을 켜고 와이퍼를 가장 빠른 속도로 둔, 첫 번째 세단의 운전 기사가 속도를 급격히 줄이고 룸밀러를 통해 뒤에 따라오는 세단의 상태를 살폈다. 곧 비상등의 희미한 깜빡임이 확인됐다. 운전 기사는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인가 신호음이 스피커를 통해 흐르고. “여보세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장님. 비가 너무 와서 이거 안 되겠는데요.. 잠깐 갓길에 차를 세우고 가시거리 확보라도 되어야 운전할 수 있겠어요. 너무 위험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남성이 룸밀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미현과 우식을 쳐다봤다. 미현이 조용히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내비게이션 확인) 조금 있으면 커브가 나오는데, 그 전에 갓길에 차를 대.“


두 대의 세단이 비상등을 켠 채 나란히 갓길에 멈춰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수족관으로 향하던 선우네 세 식구의 발목에도 제동이 걸렸다. 초조한 선우모가 뒷좌석에 앉은 선우를 보며 단단히 타일렀다.


“선우야, 안전벨트 단단히 했지?”


벨트를 확인한 선우가 말했다.


“응 엄마. 근데 비가 다시 많이 오네..”


그제서야 선우는 자신의 괜한 고집이 불러온 위험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막 커브길에 들어선 선우의 차가 휘청이더니 그대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빗줄기 뒤에 있던 낙석을 뒤늦게 발견한 선우부가 그것을 피하려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남자의 날 선 외침이 날아들었다.


“여, 여보! 선우야! 꽉 잡아!! 차 미끄러진다!!!”


선우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반대로 꺾었지만 한번 겉돌기 시작한 차체는 몇 바퀴나 빙그르 돌더니 그대로 쿵. 무언가에 세게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산비탈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미끄러진 차가 뒤집히던 순간이었는지, 혹은 선우의 의식이 먼저 끊겼는지 모른 채 아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뜬 선우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나왔다. 온몸이 수천 개의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여긴.. 어디지? 엄마.. 아빠.. 맞아! 사고가 났었던 거 같은데..


“얘야, 정신이 드니?”


선우의 망막에 노란 불빛이 왔다갔다했다. 흐릿한 초점이 맞춰지고, 선우는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깜짝 놀랐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의자들이 빽빽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불안한 눈빛을감추지 못한 선우가 마른 입술을 열어 물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요..?”


아이의 물음에 의사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그렇게 마주한 충격적인 진실. 사고 당시 선우의 부모님이 즉사했다는 것. 전복돼 뒤집힌 차 안에서 가까스로 자신만 목숨을 건져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거다. 그리고 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가족은 또 있었다. 선우네 차와 부딪힌 상대편 차였다. 갓길에 서 있던 세단 운전석의 남자와 선우와 이름, 나이가 똑같은 남자 아이가 죽었다는 것. 완전히 으스러진 차체에서 그 애의 형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했다.

부모님의 죽음과,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슬픔 같은 감정은 느낄 새도 없이 선우는 곧바로 낯선 생활을 맞아야만 했다. 단란했던 세 식구가 함께 하던 집을 떠나고, 학교를 옮기고, 친구가 바뀌었다.

일가 친적 하나 없는 선우를 맡아줄 곳은 보육원뿐이었기에.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때가 되면 학교를 가고, 밥을 먹고, 저녁이면 잠들기 전 간단한 예배를 드렸다. “오늘 하루를 주셔서,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고 읊조리며. 하지만 선우는 이 감사 기도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살아 있음에 감사라니.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도였다. 지금 이 하루를 얻었다기엔, 그 값이 너무나도 컸으니까. 부모의 목숨 값이 아니던가. 선우는 매일 저녁 읊어야 하는 이 기도에 염증이 일었다.

이곳에 온 후부터 말을 한 적은 있었던가. 선우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마 보육원 안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었다. 선우는 말을 하는 것이 무서웠다. 자신이 무언가 말을 하고 나면 거품처럼 또는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공중에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몇 달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한 눈에 봐도 기품이 뚝뚝 묻어나는 한 여자가 선우를 찾아왔다. 꼭 연예인처럼 예쁜 여자. 가만히 선우의 눈을 맞춰온 여자는 고저 없이 맑은 톤으로 이렇게 물었다.


“너, 우리 집 아이 할래?”


어쩐지 그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나기도. 또는 다행이라는 안도가 스며있기도 했다.


“나랑 너는.. 어쩐지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옅은 미소로 선우를 바라보는 미현이 희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잠시간 말갛게 내려다보던 선우가 순순히 제 손을 여자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선우가 잠시 호흡을 끊었다. 그러곤 천천히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날, 내가 서지호 널 붙잡으려고 했던 때 말야. 사고가 나던 날이 떠올랐어. 그리고 널 놓을 수밖에 없었지. 내가 또 떼를 쓰고 나면, 두 번 다시 서지호 못 볼 까봐. 영영 내 부모님처럼 너까지 잃어버리고 놓쳐버릴까봐. 겁이 났어. 되게 찌질한 놈이지?“


허탈하게 웃으며 선우가 지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가 끝인가 보네.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안 들키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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