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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17. 2019

산티아고 일지 25 여분의 것은 필요 없어요

¿Dónde estoy en este mapa?

01/05/domingo

5월 1일 일요일

desde Astorga hasta Rabanal del Camino

아스토르까에서 라바날 델 카미노까지

여행한 지 28일, 걸은 지 25일



   어제의 숙소는 좁고 열악하여 당황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보다 룸메이트가 별로였다. 같은 방을 쓰는 커플은 게을렀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이층 침대 두 개가 버거운 고작 한 평(?) 되는 방에, 그들의 모든 짐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또 휴대폰은 비상 상황을 대비해야 하므로 짬 날 때마다 충전해야 하건만 그들의 갖가지 전자제품으로 하루 종일 콘센트에 빈자리는 없었다. 어쨌든 서로의 코가 닿지 않으려면 은배와 나는 모든 것을 복도나 1층 로비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마음은 생장에서부터 걸어왔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 아마 레온부터 걷기 시작한 사람일 거야.

- 생장에선 안 그랬는데, 사람들이 배려가 없어.


불평을 쏟아냈다.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7시 반, 커플의 휴대폰이 알람을 울려대도 그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수, 은배, 나. 우리는 아침식사를 위해 카페에 들렀다.


- 오늘은……


나는 자리를 잡자마자 오늘 하루 걸을 길의 모양을 머리에 그려 넣었다. 첫날 고난도 코스에 된통 혼쭐이 나서는 배낭의 무게를 줄여보겠다며 혹시나 하고 준비해온 여분의 모든 짐들을 퇴출시킬 때, 따로 찢어가며 책에서 유일하게 남겼던 지도가 어느새 반뿐이라는 사실에,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고 아쉬웠다. 나는 카페 안 유리창을 통해 먼저 떠나는 순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동지애를 표했다. 그리고 작은 잔에 든 커피를 들이켠 후, 또렷해진 정신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드넓은 들판에 좁게 난 오솔길. 방향 표지석을 제외하곤 온통 초록빛으로 칠해진 나지막한 길. 저 멀리 무언가 우뚝 서있는 게 보였다. ‘신앙은 건강의 샘.’ 각국 언어로 새겨진 비석이었다. 우리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 보다 한글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성당에서 세요를 받고 나왔다. (내가 성당에서 찍은 사진에 남은 안내문의 글귀는 이랬다: 전설에 의하면 한 작은 소년이 이 우물에 떨어졌다. 소년의 어머니는 절망에 빠져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상 앞에서 이렇게 빌었다. 예수 그리스도시여, 아이를 구하소서! 그러자 소년은 건강한 모습으로 구원받아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 우물의 물을 가지고 삶을 걷고 있는 당신은 십자가의 표징을 만든다. 예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어, 당신을 모든 위험에서 건지시고 모든 희생 뒤 행복에 닿게 하실 것이다.)

   다음 마을은 대형 버스가 두어 대, 유독 스페인 동남부의 관광지 분위기를 풍겼다. 버스에서 내린 단체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들을 집중시키려는 듯 마을 장식은 아기자기하고 싱그러운 색깔들이 많았다. 나는 그 모든 것들 중, 파란 대문 앞 한 무리에 눈이 갔다. 그 중심에는 한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무언가를 내보이고 있었다.


- 손수 깎아 만든 지팡이랍니다! 물론이죠, 제가 깎았어요.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산 등산용 스틱이 있었다. 지금은 흙먼지에 꼬질꼬질 해졌지만, 이것을 살 때만 해도 무척 반갑게 들인 지팡이였다. 할아버지가 만든 것들은 껍질을 반만 깎아 멋을 낸 것, 손잡이를 호리병 모양으로 깎아낸 것, T자형으로 깎아낸 것. 모두 특색 있는 것들이었다. 마음에 들어 하나를 더 산다 하더라도 짐이 될 뿐이었다. 지금 이것이면 충분했다. 지수는 호리병 액세서리 하나를 사서 본인의 지팡이에 걸었다.


   좁은 길을 걷다 보면 다른 무리와 섞여서 마치 원래부터 같은 일행인 양 나란히 걷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한 번은 네 명의 스페인 사람으로 이루어진 무리와 걷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몇 개 안 되는 단어를 이용해 스페인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 ¿Desde cuándo caminaste? (언제부터 걷기 시작했어요?)

- Seite…… A, abril! (7일…… 4,4월이요!)

- ¿Habla español?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요?)

- Sí, Puedo hablar espanol pero un poco. (네, 스페인어로 말할 수 있어요. 조금이지만요.)


그들은 손뼉 치며 기뻐해 주었다. 나는 잠시 속력을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찰칵. 햇빛이 뒤를 비추고 있어 어두운 윤곽뿐이었지만 내가 이곳에서 새로 사귄 이들이었다.


   눈(Eye)으로 산을 넘고 또 넘다 보면 눈(Snow) 덮인 산이 있는데, 실상은 뜨거운 열기에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이따금씩 모래바닥에 화살표를 그으며 걸었다. 갈색 말을 탄 이. 한적한 곳 매우 잘 정리된 작은 카페. 붉은 안경, 길고 검은 곱슬머리에 꽤나 밝은 피부를 가진 체크무늬 옷의 주인장.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봤던 각종 액세서리와 손뜨개들. 털이 길고 수더분한 갈색 강아지 한 마리와 손님들의 먹을 것에 기회를 엿보는 점박 무늬의 통통한 강아지 한 마리. 들판에서 끼니를 때우며 일광욕하는 이들. 그들의 자연스러움이 부러웠다.

   또다시 메마른 땅이 이어졌다. 앙상한 가시나무 사이엔 철창이 죽 이어졌고 그 철창에는 여러 소망들이 담긴 십자가와 리본들이 달려있었다. 좁고 움푹 파인 길을 걸을 때면 짙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들이 징검다리가 되어줬다. 눈을 크게 뜨고 바닥을 살피게끔 해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곳에 여러 알베르게가 몰려 있었다. 그러나 지선은 오늘 묵을 숙소를 단번에 골랐다.


- 오늘은 여기다!


건물 전체가 동전과 지폐, 병뚜껑, 국기들로 덮여 있었다. 천장은 얼기설기 얽힌 서까래와 대들보만 남기고 시야를 터놓았다.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새들의 비행이 보였다. 나는 이층 침대로 자리를 배정받아 어기적대며 사다리를 올라 적당한 위치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 머리 위에도 작고 네모난 창문이 하나 나있었다. 나는 나의 손과 발을 햇빛에 내어 보았다. 두 사람의 손과 발인 양 색깔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온도 차가 커서 여기저기 쩍쩍 갈라진 검은 손과, 물집만 가린다면 뽀얗고 새하얀 발. 어색하지만 좋았다. 지수, 은배, 박 씨 아저씨, 나는 숙소 안 바에서 음료를 한 잔씩 시켰다. 붉은 머리에 덩치 큰 여자는 얼음이 담긴 잔에 본인의 머리 색과 닮은 와인을 반 정도 채우고, 얇게 썬 레몬을 위에 띄웠다. 그리고 차가운 레모네이드로 잔을 마저 채웠다. (띤또 데 베라노 Tinto de verano, 여름의 와인. 레드 와인과 레모네이드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로 주로 더운 여름에 마신다.) 그러자 적갈색 와인과 흰색 탄산음료의 색이 스멀스멀 섞였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여자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빨대를 꽂아 잔을 건네주었다. (나는 이 날 이것을 처음 마시고는 여행 내내 찾아 헤매었다.) 우리는 들뜬 기분을 대화로 풀어내었다. 신나는 대화에 맛있는 술이라니. 알딸딸한 것이 살짝 어지럽고…… 빠르게 취기가 올랐다. 아? 저녁에 미사가 있는데!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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