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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18. 2019

산티아고 일지 26 천국에 가는 길

¿Dónde estoy en este mapa?

02/05/lunes

5월 2일 월요일

desde Rabanal del Camino hasta Ponferrada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폰페라다까지

여행한 지 29일, 걸은 지 26일



   알베르게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이 내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색을 달리했기에 그 모든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노란색, 주황색, 청록색, 감색, 자주색, 보라색. 거기에 별이 비추고 있었다.


- 환상이네!


   오늘은 상체를 낮추고 힘 있게 다리를 휘저어야 하는 길이 많았다. 즉, 높이 올라가야 하는 길이 많았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서 철의 십자가를 만날 생각에 모든 순례자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철의 십자가는 산 위, 그 위에 쌓인 돌무더기 위, 또 그 위에 박힌 나무 기둥의 머리, 그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기도를 드릴까, 어떤 기억을 사진으로 남길까 고민했다. 어느 순례객은 돌을 집어 들고 긴 기도를 했다. 그런가 하면 오렌지색 옷을 맞춰 입고 나타난 라이더들은 단체 사진을 위해 매우 수선스러웠다. 십자가를 받치고 있는 돌무더기는 온전히 순례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본인이 올린 돌멩이 한 개가 신에게 전달되고 이 길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자료를 찾으며 철의 십자가보다도 자주 보았던 곳이 있었다. 그곳은 실물로 보니 사진에서 만큼이나 기괴하고 강렬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붉은 십자가였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붉은색이 없는 곳이 없었다. 사선으로 그어진 붉은 선, 만하린 마을의 끝을 알리는 표시는 괜스레 무섭게 느껴졌다. 여기저기 걸린 국기와 각종 깃발들은 작은 공간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작은 곳 가장 안 쪽에서 주인장이 순례객들을 맞이했다. 우리는 차례대로 그에게서 세요를 받았다. ‘순례객의 행복’? 내 순번을 기다리며 벽에 적힌 글귀를 빠르게 훑었다. 그러고 보면 과연 나는 지금 행복한가?

순례자는 행복하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순례자는 행복하다.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도착’하는 것이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면.

순례자는 행복하다. 진정한 길은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순례자는 행복하다. 배낭에 물건은 비워지고, 수많은 감정들을 마음 어디에 담아야 할지 모른다면.

이 길의 모든 굽이에서 만나는 놀라운 것들에 감사하기 위한 단어가 부족할 때면, 순례자는 행복하다.

순례자는 행복하다. 길과 진리와 삶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탐구 속에서 진리를 구하고 자신의 길과 인생을 만든다면.


   사막에서 행복이란 오아시스일까? 봉고차가 한 대, 그 밑에는 파라솔이 꽂힌 벤치가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우리는 얼른 차에 달린 차양 밑 그림자로 모였다. 그리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이 길에서의 세 번째 오아시스! 단 번에 잔을 비웠다. 쩝, 나는 처음 맛보는 달콤함처럼 한동안 입맛을 다셨다.


- 천국이네, 천국이야.


그랬다. 나는 천상의 길을 걷고 있음이 분명했다. 산 중턱을 넘어서니 어느 꼬맹이의 낙서처럼 오솔길이 구붓하게 휘어 있고 내가 그 일부가 되어있었다.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휘익 그려진 선 안에서 나의 입꼬리와 발걸음은 가벼웠다. 산은 높디높고 아래는 뻥하고 깎아지른 곳이 분명한데 높음과 낮음 그 어느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에선 걸음을 빨리할 필요도, 누군가를 앞지를 필요도 없었다. 주어진 길을 모두가 한 데 모여 차례대로 내려갈 뿐이었다. 질서 정연하게 줄 맞춰 걷는 모습이 내 눈에도 퍽 귀여워 보였다.


   베란다에 싱그러운 꽃 화분이 싱싱했다. 그럼에도 집은 곧 폭삭 내려앉을 것 같았다. 흙 집이 작렬한 태양 빛에 파삭 바스러질 것 만 같았다. 곁에서 한 숨 크게 쉬면 우리도 함께 주저앉아 버릴까 그 마을에서 나오기를 서둘렀다. 말없이 걸으며 힘을 끌어내었다. 영차. 그러자 숲 속에서 다시 오아시스를 만났다. 네 번째였다. 바의 주인은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주위를 뛰어다니거나 해먹에 누워 장난을 쳤다. 오렌지 주스 세 잔 주시겠어요? 주인장은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음료 제조에 돌입했다.


- 아, 실례했네요!


주인장은 여전히 그림자 한 점이 없어 접힌 파라솔에 미련 가득한 손길을 주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곤, 헐레벌떡 달려와 파라솔을 펼쳤다.


   도착이 늦어지면 그에 따라 햇빛은 더없이 뜨거워진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그나마 견딜 만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다시 출발한 길, 만개한 하얀 꽃에 눈길 한 번 줄 법도 한데 정면으로 마주한 햇빛은 고개를 떨구지 않고는 견디는 것을 어렵게 했다. 설상가상. 내리막에선 수없이 발목을 접질리고 밑으로 쏠린 무게중심에 발가락이 아파왔다.


- 이제 못 가. 진짜 못 가.


몰리나세카에 도착해선 잠시 생기가 넘치는 상점가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꾸준히 함께 걸어온 지수와 은배, 나는 주저했다.


- 난 대학 순례자 여권이라 대학교가 있는 마을로 가야 해.


다시 생각해도 가야 했다. 생각할 거리도 없었다. 가야 했다. 폰페라다로. 수레에 야채를 수북이 담아 옮기는 할머니의 느린 걸음을 쫓아가며, 바닥에 쓰인 숫자로 남은 거리를 유추하며, 조금밖에 안 남았어!


   우리가 가기로 한 알베르게는 마을의 끝자락에 있었다. 내일 출발할 때는 지금 걸어온 만큼 편할 것이다. 그렇다 쳐도


- 정말 죽겠다.


빨리 찾아보겠다고 달리듯 그러나 목적지에 다 와서 잃어버릴까 길가에 멈춰서 서로를 기다리며, 숙소에 도착했다. 띵동.(이때의 알베르게만이 특별히 가정집처럼 벨을 눌러야 했다.)


- 많이 지쳐 보여요. 어서들 들어오세요.

- 저희 오늘 라바날에서부터 걸었어요.

- 오! 정말 힘들었겠네요. 물 한 잔씩 마셔요.


오스피탈로가 수고했다며 물 한 잔을 내주었다. 차가운 물은 식도를 타고 꿀떡꿀떡 넘어갔다.


- 한 잔 더 주실 수 있나요?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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