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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20. 2019

산티아고 일지 28 1시간에 4킬로미터

¿Dónde estoy en este mapa?

04/05/miércoles

5월 4일 수요일

desde Villafranca del Bierzo hasta La Faba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서 라 파바까지

여행한 지 31일, 걸은 지 28일



   박 씨 아저씨는 근래 도난 사고가 있었고 베드 버그도 출몰한 숙소가 있다며 이번 마을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만은 최고였다. 더워서 잠을 깰 줄이야. 등짝에 난 땀을 식히고 나오니, 다들 아침식사를 위해 로비로 모이고 있었다. 구운 토스트를 야금야금, 시리얼을 와작와작, 바나나와 카스텔라는 오물오물, 요구르트와 오렌지 주스는 후루룩.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대화 소리. 복작대는 새벽 6시 반의 로비에서 나는 소리들은 이러했다.

   8시 15분. 알베르게를 나와 산에 폭 박혀 있는 집 두어 채를 지났고 웅장한 도로를 걸어왔다. 이틀 동안 뜨거운 햇볕에 혼쭐이 났던 터라, 오늘은 오전 중에 최대한 속도를 끌어내려 노력했다.


   아직. 이번에도 아직. 아직. 드디어? …… 아니, 아직. 트라바델로까지는 유달리 벤치가 많았다. 보통 벤치가 있으면 마을과 가까워져 있던데 희망고문인가. 나는 그들의 친절함에 괜한 투정을 부렸다. 그러다 진짜 트라바델로에 도착했을 땐, 아궁이를 때기 위해 저장해 둔 장작처럼, 길가에 나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진짜 재정비가 필요한 시간,


- 카페에 갈까?


은배가 물었다.


- 지도에 마을 끝 무렵에도 카페가 있다고 되어 있으니까 그쯤 돼서 가자.


지수가 대답했다.



- 근데 이제 마을을 나갈 것 같은데.

- 연 곳이 없어.

- 저-기! “오픈”!


나는 홀로 영업 중을 알리는 알베르게 한 곳을 찾았다. 쾅쾅쾅. 올라? (¿Hola?) 안타깝게도 답이 없었다.


- 그냥 갈까? 다들 괜찮아?


그때 2층 창문이 열렸다. 먼지떨이를 손에 든 아주머니는 여긴 문 닫았고 화장실이라면 건너편 가게에 가면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문을 닫았는 걸요. 창고 문 앞에서 우리를 보던 할아버지가 카페나 바는 4킬로를 더 걸어가거나 마을 초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되돌아가긴 뭐하고, 4킬로. 그 정도는 괜찮을지도. 아까 그 알베르게 2층에서 아주머니는 들어가 없고 손으로 턱을 괸 아저씨가 한 명이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언덕바지를 오르니 돌아서는 곳에 호텔이 하나 보였다. 우리는 호텔 투숙객도 아니고 순례객의 티는 벗을 수 없는 것이라 잠시 머뭇거렸다. 뭐, 다 돈 내고 쓰는 건데, 슬쩍 발을 들이밀어 보았다. 로비와 식당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음료와 추로스를 시켜 아침을 대신했다. 그렇지만 아직 배가 고파 가방에 있는 초코바를 하나씩 나눠 먹으려는데, 일본인 여자 가츠미가 들어왔다. 그녀도 우리와 똑같이 커피와 추로스를 주문했다.


- 간바레! (がんばれ!)


나는 옛날 고리짝 배웠던 일본어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나의 짧고 정확치도 않은 일본어를 매우 반겨주었다.


- 우리 같이 사진 찍을까?


그녀는 지수와 은배, 나와의 기념사진을 제안했고, 우리는 사진 촬영은 끝으로 휴식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발이 아파 좀처럼 속력이 나지 않았다. 앞에서 리드하던 아침과는 영 딴판이었다. 지수와 은배는 더 멀어졌다. 빨리 쫓아가야 하는데. 결국 베가에서 그들을 잃어버렸다. 이를 악 물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약국 앞 벤치에 앉아, 녹아버린 초코바를 먹었다. 손에 초코와 기름이 따로 묻어 나왔다. 거추장스러운 게 꼭 나 같아. 훌쩍. 이틀 전 무리하게 걸었던 날,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무너졌었다. 물집. 나는 새끼발가락이 걷는데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몰랐었다. 문제는 물집은 딱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가 생기니 그곳을 피해 힘주어 걷는 다른 곳에 하나 둘 더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지수와 은배에게 연락을 남겼다. '원래 가기로 했던 라 파바에 못 가고 그 전 마을에서 자게 될 것 같아요. 그 전전 마을이 될 수도 있고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절뚝거림으로 발걸음을 뗐다. 오늘 종종 마주치며 절뚝이는 나를 굳이 따라 하던 할아버지가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가 웃으며 인사하길, 유 윌 겟 잇! (You will get it!) 내가 산티아고에 5월 중순 즈음 도착하게 되면 친구들은 만나지 못한다. 해서 오늘 적어도 20킬로는 가야겠어. 나는 걷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모았다.


   콩알만 하게 보일 때부터 지수와 은배는 손을 흔들어 무사함을 표했다. 이리 반가울 수가. 이리 고마울 수가. 그들은 내가 많이 뒤처지는 것 같아 밥도 먹을 겸 식당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얼얼해진 발을 내 앞 빈 의자에 올려놓고 나는 그득하게 쌓여 나온 스파게티 한 접시를 해치웠다. 공교롭게도 식당 이름은 오메가, 마을의 끝자락이었다. 이름은 “끝”이라지만 나는 동료들의 배려에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산 정상, 라 파바. 느낌 있게 생긴 숙소로 들어갔다. 오스피탈레로는 지수가 100번째 손님이라며 생과일주스 한 잔을 대접했다.


- 와! 이 사람은 백 한 번째, 난 백 두 번째!


시원해 보이는 주스에 눈이 멀어 툭 내뱉은 나의 농담을 정색으로 응답한 오스피탈레로는 바로 방을 소개했다.


- 흠흠, 여기가 숙소가 아닌가 봐.


처음 들어간 건물에서 나와 그가 안내한 옆 건물은 마치 마구간 같았다. 그러니까 문이 양 옆뿐만 아니라 위아래로도 나뉘어 있었고, 날아다니는 벌레, 벽에서는 나무껍질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벽에 어떻게 고정된 것인지 침대들이 붙어 있고 몇 개는 천장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또 짤막한 사다리로 올라타는 화장실! 정 가운데 뚫린 구멍이 변기를 대신했고, 벽에 달린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해 샤워를 해야 하는데 공간만이라도 충분하면 좋으련만 구멍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했다. 그래서 옷을 벗지도 입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을 혼자 간직하고파 화장실 문을 굳게 닫을라치면 후엔 잘 열리지도 않아 그럴 수도 없었다. 반투명. 그래 반투명 유리로 된 문에 감사하자. 다른 곳도 비슷하겠지. 우리는 체념한 채 각자 원하는 자리에 짐을 풀었다. 숙소 앞에서 책을 읽던 할머니가 우리를 반겼던 건, 이곳에서 함께할 이가 생긴 까닭이었을까 이곳의 상황을 모르고 즐겁게 오는 우리가 재미있는 까닭이었을까. 나는 아직 완전히 찜찜함을 놓지 못했다. 벌레 약을 뿌리고 그 위에 침낭만 올려놓아 내 자리를 표한 후 밖으로 나갔다.


- 빨래는 어떻게 해야 하죠?


오스피탈레로가 나무 빨래판을 가져다줬다. 은배가 먼저 빨래를 할 동안 지수는 맥주, 나는 오렌지 주스를 한 잔씩 마셨다. 더운 날씨, 산 꼭대기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셋이 돌아가며 빨래를 하자니 그 상황이 뭐랄까 처량하고 웃겼다. 더군다나 은배가 너무 열심히 빨래를 했고, 곁에서 속도 모르고 순박하게 뛰노는 오스피탈레로의 딸이란. 그 모습이 대조되어 사진을 찍는데 안주인이 정색을 하며 자신의 딸을 찍지 말라고 가로막았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하고 사진을 지웠다.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근데 이건 또 뭐람? 내 침대 위에 나는 모르는 옷가지들과 배낭이 늘어져 있었다. 나는 오스피탈로에게 항의했다. 하나 물건의 주인은 당시 샤워 중이었고, 오스피탈레로가 문 사이로 뭐라 말해도 대답하는 것이 제대로 들었을 리 만무해 보였다. 내가 치우고 말지. 기분전환이나 하자! 맛있는 거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 식당 개들도 녹초가 되어 죽은 듯 누워 있는 판에 무슨! 그래도, 정을 들이면 괜찮지 않을까? 숙소로 돌아와 소와 당나귀가 동네 이웃집에 마실가는 것(?)을 구경했다. 동물들은 우리의 빨래가 걸린 빨래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하지만 우리에겐 생소한 풍경이었다.

   전등도 마땅치 않고 산속에서 할 것을 찾지 못해 그냥 일찍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깨웠다. 컴컴한 밤이라 누군지 보이지는 않고, 검은 그림자?


- 내 자리야!


방을 소개받을 때만 해도 아무도 없는 방, 맘대로 골라도 된다고 해서 고른 자리, 뭐가 문제지? 컴플레인할 것이 너무 많아 귀찮았다. 내가 별 대꾸하지 않고 다시 잤다는 것이 생각해보면 나도 신기하다. 검은 그림자의 실체인 어떤 여자도 본인 입장으로선 당연히 화가 났을 테고 그래서 약간 씩씩댔지만 곧 다른 자리로 향했다. 친절과는 거리가 먼 이곳을 우리는 내일 일찍 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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