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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21. 2019

산티아고 일지 29 배낭의 의미

¿Dónde estoy en este mapa?

05/05/jueves

5월 5일 목요일

desde La Faba hasta Triacastela

라 파바에서 트리아카스텔라까지

여행한 지 32일, 걸은 지 29일



   새벽 등산이라니! 새벽의 어둠은 생각보다 더 암흑이었기에, 우리는 각자의 휴대폰 플래시와 헤드라이트를 총동원시켰다.


- 근데 우리 빨래할 때 마신 음료값 냈어요?

- 응, 난 냈는데?


아뿔싸. 나는 맥주를 들이켜는 지수를 따라 자연스럽게 음료수 한 잔을 시켰었다. 그리고 한 모금의 여유를 즐기며 유유히 햇볕을 쬐었더랬지.


- 나 까먹고 그때 돈 안 냈는데!


지수와 은배는 그곳의 서비스가 너무 지나치게 안 좋았으니까 괜찮다고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꺼림칙해. 미안해요. 다음에 오면 돈 꼭 낼게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걸음아 나 살려라 산을 올랐다.


- 큭큭. 풍경이 예뻐. 그만 걱정하고 한 번 봐봐.


파스텔을 진하게 문질러 놓은 듯 안개 낀 산. 아직 나오지 않은 해는 산 너머에서 분위기를 냈다. 마치 고깃배들이 출항하는 새벽 바닷길처럼.


   우리는 아침을 먹기 위해 카페에 들렸다. 따뜻한 커피로 추위를 달래고, 오렌지 주스로 하루의 생기를 끌어올리고, 빵으로 허기를 달랬다.


- 사람은 없는데 저-기 카운터 앞에 배낭들이 왜 이렇게 많지?

- 아! 우리 저거 할래?


지수가 흥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포터(Porter, 운반인 또는 짐꾼이라는 뜻으로 ‘동키-Donkey’라고도 불리며, 순례자의 배낭을 당일 목적지까지 미리 보내는 것을 말한다. 택시와 마찬가지로 순례자의 체력적 부담을 덜어주는 서비스이다.)를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고 지수와 은배는 동시에 말했다.


- 있으면 당연히 해야지!


나는 내 배낭, 내 짐이 갖는 의미가 컸었다. 이 길에 내가 짊어지고 걸어야 할 할당량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도 걱정할 만큼 바리바리 싸왔던 배낭에서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을 조금씩 빼내가는 작업도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그렇지만 가방을 맡기는 서비스가 솔깃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수는 의외로 행동이 빠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주춤하는 동안 배송지가 될 오늘의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럼, 오늘만…… 결국 다음을 위해 포터를 신청하기로 했다. 작은 가방을 꺼내어 당장에 필요한 우비나 판초, 순례자 여권 등을 넣었다. 나머지 짐은 비행기에 수화물을 붙이듯 꽁꽁 잠그고, 이름과 배송지, 전화번호 등을 적은 종이와 함께 오스피탈레로에게 맡겼다. 가방을 두고 떠난다고 생각하니 뛰어다닐 수도 있겠다는 허황된 다짐 혹은 소망이 즉각 반응하여 샘솟았다. 그러나 빠를 줄만 알았던 걸음은 다른 볼거리들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깨의 짐을 내려놓으니 풍경에 감탄하는 일을 지나칠 수가 없었고,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드디어 갈리시아에 진입했다. 걷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걸음도 멈추지 않고 사진을 찍거나 혹여 여럿이 찍을 일이 생기더라도 셀피로 때우기 일쑤인 우리는, 그때만큼은 지나가는 이를 붙잡아 부탁을 했다. 저희 셋 사진 좀 찍어 주시겠어요?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한 성당과 마주했다. 그곳은 신부였으며 순례길의 개척자이기도 한 ‘돈 엘리아스 발리냐’(Dr. D. Elías valiña)를 기리는 곳이었다. 돈 엘리아스는 성 야고보의 순례길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되살리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는 피레네 산맥의 론세스바예스에서 시작하여 길을 청소하고, 특히나 까다로운 교차로가 나올 때면 올바른 길을 나타내기 위해 오늘날 순례길의 상징이 된 노란색 화살표를 그려 방향을 표시했다. 전설 같이 내려오는 한 이야기로는 노란색 페인트로 가득 채운 차를 타고 화살표를 그리며 스페인의 북쪽을 가로질렀다고 한다. 나는 칸이 얼마 남지 않은 순례자 여권을 새로 사야 했다. 그러던 참에 기념이 될 만한 곳을 찾은 것이었다. 쾅. 나는 새 여권을 샀고 다시 첫 페이지, 첫 칸에 세요를 받았다.


   레볼레이라라는 마을의 알베르게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나이 지긋한 봉사자 분들이 대부분인 곳과 다르게 옷을 맞춰 입은 청년들이 식당의 일을 보고 있었다.


- 오렌지 주스랑 보까디요 하나 주세요.

- 주스는 저기 화장실 앞 자판기에서 뽑아서 드시면 됩니다.


자판기 전면엔 투명으로 된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덕분에 생과일주스 만드는 것을 그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동전을 넣으면 위에서 오렌지가 통째로 떨어져 나오고 아래로 착즙 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러니 이곳 주스가 더 맛있는 거였어! 나는 자판기에서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더 뽑아 마셨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 접수대 바로 앞에 지수, 은배, 나. 세 명의 배낭이 쪼르르 세워져 있었다. 각자의 배낭을 들고 침실로 향하는데 그새 배낭의 무게를 잊었던가! 묵직함이 느껴졌다.


- 배낭이 없다고 해서 발이 안 아픈 건 아닌 것 같아.


지수가 예약해놓은 숙소는 고급 펜션이었다.


- 쉬는 김에 제대로 쉬고 가자고.


   저녁식사는 한스와 함께 했다. 한스는 은배가 지난 길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로, 귀가 조금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발음이 조금 어눌했는데 나는 그런 한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더욱이 말주변도 없어 대답할 거리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한스는 어색한 미소로 입을 다물고 있는 내게 어린아이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듯 이따금씩 뜬금없는 질문들을 던졌고, 모든 이야기에 꼭 한 번씩은 나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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