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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비 May 16. 2021

0.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2021. 05. 10.  파랗게 물든 밤.






  나는 지금껏 주어진 흐름 안에서 모나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 흔한 일탈 하나 없이 기초교육을 마치고 점수에 맞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군 복무를 끝내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곧장 사회로 나와 마땅히 해야 하는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었기에 나 또한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착실하게 죽어있었노라고.


 때늦은 사형선고였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으나, 마음 어딘가가 죽어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 그리하여 살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나를 안에서부터 좀먹어가는 이 물결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펜 끝으로 토해냈다.




적어도 하루의 얼만큼은 나답게 살겠다.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내게 주어진 것들을 짊어진 채로 나아가야 했다. 고독하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내 하루 안에는 자식으로서, 동생으로서, 팀원으로서,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주어진 의무와 책임이 가득 담겨있었기에. 노을마저 차게 식은 밤, 책상 앞에 앉아 기어이 틈을 내어 내게 준다. 이름도 직업도 필요하지 않은 곳에 나를 누인다. 나로 산다는 것은 이토록이나 힘겹고 고된 것이었다.


 같은 나잇대의 흐름에서조차 편승하지도, 거스르지도 못하는 평범한 나는 그 커다란 물결에 저항해보겠다는 결심과 작은 행동만으로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하나 제대로 해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일지언정.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워도 지금 여기에 남기 위해서 애쓴다. 찰나라도 움켜쥐기 위해 쓴다. 나 아직 여기에 살아있다고.

.


 지난 200여 일 간 막연히 살아있었음을 남기기 위해 부단히 썼다. 내일의 가장자리에서 남기는 오늘의 유서였다. 침묵에 잠긴 유언이 쌓여갈수록 내 하루는 조금씩 선명해져 갔다. 그러다 문득, 일상이라는 흐름에 내가 휩쓸려 내려가지 않게 됐음을 알게 됐을 때. 지금껏 쌓여진 것들을 다시 쌓아가기로 결심했다.

.


 언젠가의 것들이 행복하게 그리워질 만큼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깊게 눌러써 남겨둔다.



 주어진 지금을 마음 가득히 살아갈 것.



2021. 05. 10

이자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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