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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비 May 28. 2021

0. 책임져야 하는 것이 많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야.

2021. 04. 18.  파란 하늘에 대고 썼다.






책임져야 하는 것이 많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야

자연스럽게 행복보다 걱정할 것을 먼저 찾아내니까


하지만 그 씁쓸한 마음 덕분에

행복이 더욱 달콤한 것은 아닐까

.

.



 알아서 제 앞길 잘 찾아가는 아들로서, 친구 같은 동생으로서, 그렇게 가족 구성원으로서.
한 명의 직원으로서, 신입 사원과 회사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회사의 자금 흐름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
친구로서, 지인으로서, 연인으로서, ….


 내 하루를 당신들로 채워갈수록 사물에 그림자가 지듯이 행복만큼의 걱정들이 피어났다. 나 대신 나 비슷한 무엇이 그 역할들을 충실히 살아 내다 보면, 이 음울한 기분은 곰팡이처럼 마음 곳곳에 번지곤 했다. 대충 슥슥 문지르고 털어내거나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렇게 나를 소홀히 하다가 내 안에서 쉴 곳을 잃게 되면 나는 종종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게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무감정하고 무성의한 말에 더 큰 상처를 입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이 사슬처럼 하나 둘 나를 휘감아 이내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처럼 큰 실수를 하곤 했다. 그것이 괴로워 종종 모든 것들을 다 벗어던진 다음, 꿈처럼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행복과 걱정 사이에서 영원히 줄다리기를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저 홀로 아득해지기도 했다.



 나를 적극적으로 알아가고 있는 지금에서는 조금 알 것 같다. 괴로움에 온 마음이 물든 순간, 진정으로 내게 필요했던 것은 아주 잠시만이라도 숨을 고르는 것이었다고. 가족도, 직업도, 나이도, 이름도 모두 잊고. 그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모든 것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이제 나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수 있는 취미를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필사를 하고, 글을 쓰고, 카메라에 꽃을 담고, 산책을 하고, 가만히 벤치에 앉아 봄볕을 쐬고, …. 내가 잠시 사라지고 행위만 남는 기묘한 행복감을 찾아다닌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그 순간에 오롯이 존재하는 연습이 아닐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2021. 04. 18.

이자비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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