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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Feb 03. 2024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감정탐색(1)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억울함, 우울함

피해의식은 피해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 방어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그 피해의식은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억울함, 우울함’이라는 여섯 가지 마음 상태에 의해서 표현된다.... 피해의식의 원인을 발견하려고 애쓸 때, 피해의식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다. -『피해의식』황진규     



'피해의식'이라는 단어에 반감이 든다.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등과 같은 감정은 다루기 어렵지만 개인적이고 내밀한 느낌이다. 나만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감추던지 아니면 열어젖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개인적 선택의 느낌이 든다면 피해의식은 좀 다르다. 타자와의 상호관계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되는 감정이다. 까칠하고 고약하다. 마치 피부에 각질이 일어나듯이 밀면 밀수록 끝도 없이 밀려 나올 것 같이 불편하다. 그러니 애초에 보고 싶지 않고, 시작을 열고 싶지 않은 단어이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나는 겁이 나는 것이다. 피해의식은 '겁'과 심리적 작동 기제가 유사하다.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불편한 감정을 벗어나는 방법은 이 감정을 직면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이라면 치료해 주고 돌봐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감정과 만나야 한다. 일단 만나야 한다.


피해의식은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억울함, 우울함’이라는 여섯 가지 감정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다. 여섯 가지 감정을 이미지로 하나씩 탐색해 보았다.




1. 두려움

두려움. 아무것도 없어 무섭고 무엇이 있을까봐 더 무서운 마음


내게 두려움은 실체를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다.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안개까지 자욱해져 하늘도 희뿌옇다. 나는 깊은 산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렸다. 숲에는 내 키만 한 풀들이 자라고 있었으며 나는 저 풀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풀벌레 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 있다. 무언가 나올 것 같아 무섭고 불안하다. 무언가가 등장한다면 그것이 나를 위험에 빠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믿어 될 것인지 나를 헤칠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게 두려움은 이런 이미지다. 나는 어둠으로 가득한 숲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지만 그 길에는 온갖 방해물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장애물은 고작 풀들뿐이다. 나는 그 풀에 겁을 먹고 있다. 겁을 먹고 있는 이유는 불확실함에 있다. 저 풀 속에서 무언가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 그것이 미리 알 수 없다는 공포, 통제할 수 없다는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불확실함에서 생기는 것이면 내 상태를 점검해 보자. 나가갈 방향을 모르고 있는가? 풀을 헤치고 나갈 정도의 체력이 없는가? 위험에 방심하고 있는가? 만일 어디선가 예측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나에게는 정녕 대응할 힘이 없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아니다'고 대답할 것이다. 난 이미 풀을 헤치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내가 망설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것과의 마주침. 새로움과 마주치는 과정이 주는 기쁨이 아닌 소모됨. 혹시나 있을지 모를 비난과 상처들이 욱신거린다. 저것은 고작 풀이지만 송곳처럼 아픈 곳을 다시 찌를까 봐 겁먹고 있는다. 작고 사소한 것에 크고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며 움츠리고 있다. 두려움은 상상이 만들어낸 감정이다.     


두려움 작업을 한번 더 했다. 난 겁을 먹고 있다. 내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하지 못할까 봐, 어리석게 피해를 당할까 봐 겁먹고 있다. 이런 어둠을 두려워했던 적이 있는가?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력했던 적이 있는가?     


어릴 적 살던 골목길이 생각났다. 우리 집 앞길은 유난히 어두웠다. 집 맞은편에는 성당의 높은 담벼락이 있어서 차들이 늘 주차되어 있었고 골목길에 가로등도 한 개밖에 없었다. 가로등이 없는 구역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사람이 많이 다니던 길을 돌아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20M 정도의 거리에 불과했다. 아이 걸음으로 50폭 정도쯤의 거리일 것이다. 내게 그 50번의 발걸음은 공포였다. 골목을 돌아 들어갈 때면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음박질을 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며 엄마가 빨리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제발' '제발' ...


난 언제부터 어두운 골목길을 무서워하게 된 것일까? 초등학교 2학년 길 건너 윗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어두운 길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이전에 살던 동네는 집집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살며 서로의 집에 왕래했고 이웃들끼리 사촌처럼 지냈다. 어두운 밤에도 저녁을 먹고 난 후 밖으로 나가면 길목에는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이 함께 모여 어울려 놀곤했다. 어둠도 즐거움의 일부였다. 그런데 이사를 그곳은 모두 대문을 닫고 살았다. 이전 동네보다 깨끗하고 멋진 집들도 많았지만 스산하고 무서웠다. 두려운 감정은 새로 이사 간 동네의 밤길의 이미지와 같았다.


어둠이 짓게 깔린 어두운 길을 연필로 칠했다. 하얀 도화지를 깜지로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엄청난 노동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 물감이나 파스넷 등 물성이 강한 재료로 바꿔볼까 하는 유혹을 받았다. 어둠을 쉽게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그 순간 알았다. 어둠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반복되고 덧칠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어둠을 온 에너지를 다해 만들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쉽게 '무서워', '두려워', '겁나', '마음이 무거워'라고 말하곤 했지만 실제 어둠을 담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나는 그 어려움에 노동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두려움은 기억하고 있는 그만큼의 두려움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도화지의 일부만 검정으로 칠했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구석의 작은 면을 깜지로 만들고 나니 생각보다 어둡지가 않았다. 흑연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내가 가진 두려움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었다.

 

무거운 감정 속에 빠지기보다 나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어진 선을 찾았으며 그 선들이 만들어낸 모양을 발견했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냈고 그 속을 색칠했다.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던 감정 속에서도 놀 수 있었다. 어둠도 즐거움의 일부였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차올랐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마주침 그 자체가 아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조심, 나를 과도하게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어두운 길을 무섭게 한다. 우아하게 걷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엉거주춤하더라도 그 길을 건너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는, 그러면 다음에는, 그리고 다음에는 좀 더 나은 몸짓으로 그 길을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걸어야 한다. 한 발을 떼야한다.




2. 분노    


분노. 참을 수 없다면 폭발할 수 밖에

 

분노에 대한 이미지는 불꽃이다. 불처럼 화르르하고 타오르는 불꽃이다. 하지만 이번의 불꽃은 질서 있게 조절되어 있다.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불이지만 압도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에너지 그 자체로만 느껴진다.

     

나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한번 화가 나면 통제할 수가 없었다. 어느 시점에 불길에 휩싸였는지도 모른 채 타올랐다. 나조차도 나의 뜨거움에 놀라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물론 주변도 주변도 불길에 휩싸였다. 이때의 나는 화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억압되었던 상태였다. 화를 참고 삭이면 무의식 아래 숨어 들어가 있다가 몸과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화가 화산처럼 뿜어져 나온다. 큰 압력에 눌려있었기에 위협적으로 터져버리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지금은 분노의 압력이 그렇게 크지 않다. 덜 참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더 하고 살수록 쌓이는 것이 덜하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쌓아두지 않고 터지지 않게 조절한다. 압력밥솥의 김을 빼며 힘을 조절하듯 말이다.      


지금은 분노를 드러내는 방식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내가 분노하는 포인트는 압력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내게 분노는 쌓이는 감정이다. 내가 분노할 때는 참다 참다못할 때 분노하게 된다. 덜 참으며 약하게, 많이 참으면 심하게 분노한다. 내가 분노하는 순간은 억울함과 관련이 있다. 억울함은 꾹꾹 눌러놓은 서러움이다.      




3. 억울함


억울함. 내맘 아무도 몰라, 나만의 특별한 이 서러움

  

 억울함은 세상이 나를 몰라줄 때 생긴다. 내 마음을 몰라 줄 때, 내 사정을 몰라줄 때,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때,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때 생긴다. 나는 원하는 것에는 꾀나 공을 들이는 편이다. 애쓰고 애쓰고 애썼는데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러움이 폭발한다. 내게 분노는 슬픔과도 비슷하다. “이 정도로 애쓰고 사는데 왜 알아주지 않지?”, “왜 사랑해 주지 않는 거야?”라는 서러움이다.  

   

홀로 서있는 나무의 반대편은 씨꺼멓게 골아 있다. 울창하게 서 있는 나무의 반대편 속사정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땅속의 나무가 슬픔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큰 나무는 자기 크기만큼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뿌리가 강하고 깊어야 땅 위의 나무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는 만큼 뿌리도 같이 자라난다. 내게 있었던 억울한 일들, 내가 당했던 피해들, 내가 흘린 눈물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해의식의 6가지 감정중 억울함을 가장 크다고 생각했지만 그림작업을 하면서는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았다. 억울한 정서의 뿌리가 깊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느낀 억울함의 나의 감정이기보다는 타자로 인해 전이된 감정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의 감정은 타자에게도 전이되고 타자의 감정인 내게도 전이된다. 행복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고 우울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감정은 단순히 비슷한 감정으로 물드는 것뿐만 아니라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한다.


현대정신분석에서는 '투사적 동일시'라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있다. '투사적 동일시'는 단순히 나와 비슷한 감정의 상태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나와 비슷한 감정 상태를 경험하게 만들어 자신의 상태를 알리려고 한다. 아이가 울음으로써 부모는 마음이 괴로워지고, 부모는 아이가 무엇이 힘든지 살피게 되는 것이 '투사적 동일시'의 예이다.


억울함이 큰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어린 시절 바쁜 부모님을 대신하여 가족들을 돌보아야 했다.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하고 손수 형제들의 도시락을 싸기도 했다. 왜 자신이 그 짐을 다 짊어져야 하는지 늘 억울해했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유년시절이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좀 더 신경을 쓰며 배려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나와의 관계에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계속 함께 한 어느 날 정말 내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난 또 미안한 마음에 그 친구보다 더 양보하고 희생하려고 했다. 그렇게 그 친구와 함께 억울배틀속에 빠져들었다. 그 친구의 억울함이 강해서인지, 그 억울함을 풀어줄 내 사랑이 약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린 함께 억울함의 웅덩이에 빠져버렸다.


지금은 내 감정이 전부 내 몫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종종 억울한 감정의 원귀들이 나를 찾아오면 동요되곤 한다. 내가 해결사가 되려 하거나 도울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무기력해진다. 한편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이가 해결하려 할 때 질투심이 일어난다. 자연스레 열등감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다.




4. 열등감


열등감. 꼴보기도 싫은 불편한 감정상태


열등감이 내재화되었을 때는 위축으로, 외현화되었을 때는 질투로 나타난다. 왼쪽은 위축이다. 곰팡이 핀 것처럼 우울하고 불편하며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오른쪽은 질투이다. 내게 없는 것이 있는 사람에게 가지는 마음이다. 타인을 보며 내게 없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내게 없는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되면 불편해진다. 그것을 볼 수록 내 결핍이 더 크게 부각되니 말이다. 작업을 하는 내내 불편하고 힘들었다. 결과물도 마음에 들지 않고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다. 6가지 감정중 가장 회피하고 싶은 감정이다. 왠지 눈물이라도 실컷 흘리면 편해질 것 같아서 물감을 흘려보았다. 시원했던 마음은 잠깐 뿐이었다. 눈물 자국은 감옥처럼 보였다. 나 스스로 만든 감옥. '난 부족해'. '난 못났어'라고 생각하하는 마음의 감옥, 내가 만든 나의 감옥에 갇힌꼴이 되었다.

     

언제 열등감을 느끼는가? 열등감의 시작은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적 오빠를 보며 열등감을 느꼈다. 오빠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귀운 보조개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좋아할 만한 조건이 있다가 보다는 막연히 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오빠가 하는 것은 다 따라 했다. 어깨너머로 공부하고 오빠가 읽는 책도 따라 읽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늘 열등했고 이인자였다. 이인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져야 한다. 나를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잽싸게 파악하여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 나는 힘 앞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사랑받기 위해 헌신하다 못해 희생했다. 때론 욕망이 없는 사람처럼 순종했다. 정해진 목표에 도달했나 싶으면 또 다른 목표가 주어졌고, 그 목표를 달성했나 싶을 때마다 또 다른 과제가 주어졌다. 대체 언제까지 정상에 깃발을 꽂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공허감이 찾아왔다. 열등감은 나를 과도하게 노력하게 했고 피로하게 만들었다. 나를 소진시키며 노력했지만 성취의 기쁨은 잠깐 뿐이었으며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정작 받고 싶은 사랑은 받지 못했다. 과도하게 노력은 성취를 맛보게 했지만 내면의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받고 싶었던 사랑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질투를 극복하기 위해 전투적으로 살았지만 내가 찾은 것은 신기루였다. 나는 잘못된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안달하며 살아왔다. 인정받고 싶다면 사랑하는 타자로부터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랑하는 타자에게 헌신하고 그 타자로부터의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나는 여전히 위축되어 있다. 방향도 알고 방법도 알지만 위축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덜 걸어갔기 때문이다. 감옥을 나와 더 멀리 나와야 한다. 더 멀리, 더 멀리 걸어가다 보면 그때 열등감은 다른 얼굴로 그릴 수 있으리라. 열등감은 부족한 것을 채움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열등감은 다른 감정보다도 이유가 분명하고 해야 할 것이 명확하다. 내게 없는 것을 채우려고 노력하면서 넘어설 수 있다. 지적 능력에서 부족함을 느낀다면 지식을 쌓으면 된다. 신체적 허약함에서 결핍을 느낀다면 체력을 단련하면 된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면 된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채워나가는 만큼 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채워진 만큼, 걸어간 만큼, 다르게 살아간 만큼 열등감이라는 자기만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5. 우울함


우울함. 물먹은 무거움,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어리숙한 집합체

 

우울함은 슬픔, 죄책감, 후회의 감정을 동반하며 생의 활력이 낮고 세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매우 복잡한 상태이다. 우울할 때는 몸이 스펀지에 젖은 것 같이 무겁고 시야가 뿌옇게 느껴지곤 했다. 요즘 느끼는 우울감은 가벼운 슬픔의 감정이다. 몸속에 안개비가 내리며 물이 확 번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도화지에 물을 축축하게 적신 후 먹물을 떨어 뜨렸다. 먹물의 번짐이 황홀했다. 이처럼 멋진 슬픔이라면 잠시 즐겨도 괜찮을 것 같다. 먹물을 튀기고 뿌리면서 한동안 놀이를 하고 났더니 얼룩들이 생겼다. 얼룩 속에 숨은 그림을 찾았다. 새가 한 마리 보였다. 나는 알 수 없는 복잡한 상태를 살피고 찾아내려고 한다. 뭉쳐있는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 그 의미를 들여다보려고 한다. 우울함은 친숙한 감정이기는 하지만 나를 압도하지 못하며 무기력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6. 무기력

무기력. 문을 열고 싶지만 열고 싶지 않다.


무기력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감정이다. 호기심이 많아서 삶이 지루하다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을 별로 가져본 적이 없다. 무기력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았다. 무기력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삶의 활력을 만들지 않게 되는 무의식의 방어기제(피해의식, 황진규)"라고 되어 있다.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활력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은둔형 외톨이’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면 이 또한 은둔해 있는 것이다.

 

나는 문 앞에 있다.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나는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문을 찾으려 하지만 그 문을 찾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 저 문을 열면 되는데, 저 손잡이를 잡으면 되는데 교묘히 그 옆에 손을 대고 있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내게도 무기력이 있다. 문턱을 넘어가지 못하는 무기력 말이다. 이 무기력은 두려움과도 연결된다. 내게 피해의식 중 가장 강력한 얼굴은 ‘두려움’이다. 난 여전히 잡아 먹힐까 봐 겁먹고 있다. 어둠 속에서 닫힌 문을 연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그 문을 여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이곳이 어둠천지의 방이라면 이 방에 더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다른 어둠의 방이 나올지 아니면 밝은 방이 나올지는 그 문을 열어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수많은 문을 열었다. 오늘만 해도 난 몇 개의 문을 통과했다. 수많은 문을 열며 만났던 무수한 많은 기억들이 있다. 많은 슬픔과 많은 기쁨이 있었다. 문을 열지 않는다면 더 많은 기쁨을 만날 수 없다. 슬픔을 거절한다면 기쁨 또한 만날 수 없다. 그러니 문을 열고 한발 내딛자. 그 너머로 넘어가 보자.  


내가 들어가려고 하는 곳은 두려움의 길이 아니다. 두려움 너머의 세상이다.

그러니 겁먹을 필요가 없다. 두려움에 머무는 것이 가장 큰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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